아이스하키? 팔자에도 없는 하키맘이 된 사연
글을 들어가며
나는 캐나다에 산다.
올해로 햇수로 5년 차를 맞이한 캐나다 살이가 이렇게 길어질 줄은 처음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일에 치여서 너무 괴롭고 힘들던 나날을 보내던 나는 안식년처럼 좀 쉬고 싶기도 했고, 마치지 못한 공부를 캐나다에서 하리라 막연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캐나다로 아이들을 데리고 오게 된 사건은 일을 쉬면서 공부도 하고 하는, 그저 그런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말 그대로 ‘꿈에 부푼’ 선택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 당시의 내가 얼마나 순진했고, 아는 것 없이 용기만 많았던 상태였는가 반성하기도 한다. 아마 지금의 지성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면 절대 다시는 저런 선택을 과감하게 할 수 없었으리라. 역시나 모르면 용감하다.
어쨌든 캐나다에서 아이들을 학교를 보내면서 나의 기대 넘치고 의욕 넘치던 캐나다 생활은 하루하루 좌절의 시간이었다. 도시락을 싸고, 온갖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차로 여기저기 데려다 놓고 데려오고에 바빠 나의 시간을 갖기 어려운 곳이었다. 또 언어 문제로 무척이나 힘든 시기를 나와 아이들 모두가 보내야 했기에 슬픔을 속으로 삼키고 눈물을 몰래 훔치는 나날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나보다 나아서 훨씬 잘 적응하긴 했다. 안 되는 영어로 어떻게든 친구를 사귀고 하루하루 눈에 띄게 영어도 늘어갔다. 나는 캐나다 거주 5년 차인 지금도 여전히 영어가 어렵기만 하지만, 아이들은 한국어보다 때로는 영어가 더 편하다는 듯 대화를 한다. 어려야 언어를 배우기 쉬운 것은 사실인 듯하다.
첫 해부터 다행히 매일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플레이 데이트라고 해서 놀러 갔다가 친구들을 데리고 또 우리 집으로 오고 하는 날들이 이어졌는데, 한 코카시안 친구와 부쩍 친해져서 교류가 잦았다. 그 집은 아들 둘에 딸 하나-지금은 딸이 둘이 되었다-의 다복한 집이었는데, 집에 갈 때마다 집 앞에 하키 네트와 하키 스틱이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온 가족이 하키를 좋아하는 집이었고, 실제 아이들이 아이스하키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엄마가 나에게 아이들 하키를 시켜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었다. 당시에 나는 정말 농담이 아니고 하키가 어떤 경기인지 대충 교과서적으로 알기만 했지, 실제 경기를 심지어 TV 중계로도 본 경험이 없었다. 물론 ‘캐나다’하면 당연 ‘하키’인 것은 알았지만 추상적으로 아는 것과 아이들이 직접 하키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마침 친구 집에 가서 하키를 같이 하면 노는 재미를 붙인 아이들도 나에게 하키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마 그때 아이스에서 하던 것도 아니고, 그냥 볼 하키였을 텐데도 그저 친구랑 노는 게 좋았던 모양이다. 어떻게 등록하면 되는지 물으니 이리저리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 솔직히 당시 나는 영어가 많이 부족해서 다 알아들었다고 차마 말할 수 없다. 대충 사이트 알고 가서 어떻게 등록하는지 알아보다가 결국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래서 아이들이 처음 등록을 하게 되었고, 이제 하키를 한 지 4년 차에 이르렀다. 중간에 큰 아이는 관두긴 했지만, 팀이 우승도 했고 그 하키 팀을 통해 많은 현지 친구들도 사귀고 즐거운 기억이 많이 생겼다. 둘째 아들은 아직도 하고 있는데, 좀 재능은 있는 것 같다. 내 자식이라 콩깍지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좋은 평을 듣고 있고 대표팀에서 활동도 하고, 스프링 하키에서 나름 인정받으면서 계속 하키를 열심히 하는 중이다. 덕분에 나는 팔자에도 없던 ‘하키맘’이 되었다.
‘하키맘’이라는 표현은 캐나다에서는 정말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생, 극성, 뒷바라지, 열정……' 너무 많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우면 ‘아, 나 하키맘이야’ 하면 대화하는 상대를 단 번에 이해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브런치에 컴백해서 글을 쓰고자 마음먹었다. 그간 울고, 웃고, 화나고, 아팠던 모든 기억이 하키와 역여 있기 때문이다. 단 한 편의 글로는 표현이 안되기도 하거니와, 나처럼 혹시나 캐나다에 와서 맨땅에 헤딩을 하며 팔자에도 없는 하키맘이 될지도 모를 잠재적 K-하키맘들을 위해서 글을 쓰고 싶다. 그분들이 나와 같은 고생은 안 했으면 한다. 지금은 이렇게 담담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상태가 되었는데, 이것조차 참으로 나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다.
“그래, 고생했다. 융융이.”
어쩌면 이 글은 나를 위한 글일지도 모른다. 요새 다시 글 쓰는 일을 하게 되어서 솔직히 아주 많이 바쁘지만, 나를 위해 또 미래의 캐나다에서 고생할 한국 하키맘들을 위해 ‘캐나다에서 하키맘으로 살아남기’ 이야기를 이제부터 틈틈이 풀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