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루냐.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땐, 스페인의 행정 지역 정도로만 생각했다. 서울과 경기도처럼 스페인에도 각자의 지역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며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카탈루냐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다. 슬픔과 저항, 꿈과 독립을 담고 있는 하나의 국가이자 문화였다. 바르셀로나의 야경 투어에서 카탈루냐에 대한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곳은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투어의 시작 지점은 콜럼버스가 서 있는 동상 앞이었다. 해가 지면서 거리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는 순간, 광장 한편에는 천사 복장을 한 이가 관광객에게 축복을 나누고 있었다. 물론 약간의 돈을 지불해야 했지만, 그 모습조차 이 도시의 낭만을 더해 주었다. 우리의 작은 관광팀은 가이드를 따라 바르셀로나의 고딕지구로 발길을 옮겼다. 고딕지구의 골목을 걸으며 2천 년 전 로마의 흔적을 만나고, 카탈루냐의 슬픈 역사를 듣게 되었다. 카탈루냐는 한때 번영을 누리던 강력한 자치 국가였다. 1934년, 카탈루냐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독재자 프랑코에 의해 무참히 무너졌고, 그 후로도 카탈루냐 사람들은 긴 억압과 착취를 감내해야 했다. 스페인 정부는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탄압했고, 아이들조차 제 말을 뺏긴 채 성장해야 했다. 바르셀로나의 낡은 건물에는, 카탈루냐 사람들이 총살된 흔적이 남아있다. 초등학교 운동장의 벽에 여전히 새겨진 총탄 자국들은 그 아픈 시간을 증언하고 있다. 한때 그 자리에 서 있던 이들은 그저 독립을 꿈꿨을 뿐이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탄압과 죽음이었다. 학교 근처 골목을 걷다 보니 영화 향수가 촬영된 장소가 나타났다. 영화에서 서민의 아픔을 보여주던 그 골목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마당에서 이어져 있었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지금도 그 총탄 자국을 보며 카탈루냐의 자유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딕지구는 그런 역사와 함께 예술의 성지로도 알려져 있다. 우리는 길을 따라 가우디와 피카소가 남긴 흔적들을 하나씩 마주했다. 가우디의 첫 작품인 가로등이 도심 한가운데 서 있었고, 피카소가 첫 전시를 열었던 술집 ‘네 마리 고양이’도 그 길 위에 있었다. 비록 이날은 휴무라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그곳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한때 이 거리를 누비던 젊은 피카소를 상상해 보았다. 아비뇽의 처녀들로 유명한 피카소의 그림, 그 배경이 된 아비뇽 거리도 걸어보았다. 항구와 가까운 이 거리는 그 시절 사창가 골목이었다고 한다. 피카소가 그린 여인들은 그 거리에서 생을 이어가던 여성들이었고, 피카소는 그들의 얼굴을 붓에 담았다. 고요하게 서 있는 건물들은 예술과 삶의 상처가 엉켜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한 여인이 2층 테라스에서 고요히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피카소는 이곳의 모든 것, 거리와 사람, 삶의 흔적에서 영감을 얻어 미술로 표현한 것이다. 이어서 구엘 저택이 있는 길을 지나며, 피카소가 한때 구엘저택 건너편 옥탑방에서 구엘 저택의 옥상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이곳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채 살아왔고, 그 속에서 피카소와 같은 예술가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어의 끝은 바르셀로나 대성당 앞에서 마무리되었다. 이미 시간이 꽤 흘러 다리는 뻐근했지만,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가이드의 이야기 속에 빠져 있었다. 처음 알게 된 카탈루냐의 역사와 아픔, 그리고 그 속에서 탄생한 예술들이 다가올 때마다 그곳에서 마주한 모든 것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고딕지구의 골목을 걷고 있을 때, 카탈루냐의 국기가 펄럭이며 그들의 정서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 깃발은 오랜 세월 억압과 저항, 독립의 꿈을 상징하며 바람 속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제주 4.3과 광주의 역사가 떠올랐다. 아픔 속에서도 정체성과 자부심을 지켜낸 그들의 모습은 슬프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이제는 카탈루냐를 알았다. 단순히 스페인의 한 지역이 아니라,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하나의 민족이었다. 그저 단명으로 끝난 공화국이 아니었다. 1641년, 1873년, 1931년, 1934년, 그리고 2017년까지 다섯 번의 공화국을 선언했지만 매번 좌절을 겪은 그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며 자유를 꿈꾸는 모습은 바르셀로나의 건축물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