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얼굴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희웅 Apr 22. 2024

잘 보냈다.

 분명 이곳에 주차했는데 차를 찾을 수 없었다. 주차 사진이라도 찍어 놓을 걸 뒤늦은 후회를 해본다. 이 넓은 주차장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이제는 걸어 다닐 힘도 없었다. 주차된 수많은 차를 바라보다 기억났다. 아, 나는 차가 없지.      


 며칠 전 차를 팔고 난 후 꾼 꿈이었다. 30년 가까이 운전했다. 출퇴근 위주로 운전하니 한 해 만 킬로도 타지 못했다. 퇴직을 하니 일 년에 삼천 킬로도 타지 못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날이 좋은 날에도 항상 주차장에만 서 있는 차에 미안했다. 나는 달리지 못해도 너만큼은 좋은 주인 만나 마음껏 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나는 이 친구의 얼굴보다 뒷모습이 좋았다. 운전자는 운전하면서 앞차의 뒷모습을 가장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 뒷모습은 매우 중요하다. 도로에서 처음 본 이 친구의 뒷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차를 바꾸면 이 친구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뒷모습이 오랫동안 뇌리에 각인되었다. 흡사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날라 온 뒷모습이었다. 날렵한 후미등과 트렁크를 가로지르는 크롬 장식, 이중 머플러의 디자인은 개성이 뚜렷했다. 후줄근한 나에게는 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런 나와 사 년을 함께했다. 새로 만날 주인은 멋있는 정장을 차려입은 중후한 운전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팔기로 마음먹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세차였다. 그동안은 주유소에서 자동 세차를 해왔다. 하지만 이번 세차는 마지막이 될 세차였다. 나는 셀프 세차장에서 구석구석 차를 닦았다. 마지막으로 밥이라도 먹이고 보내고 싶었다. 배부르지는 않겠지만 성의만 표시했다. 차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그동안 고생했다는 마지막 인사했다. 갑자기 ‘추노’ 드라마가 생각났다. 생각난 장면은 천지호가 죽는 장면이었다. 오열하는 대길에게 마지막으로 농을 던지며, 노잣돈 엽전을 스스로 자기 입안에 밀어 넣는 장면. 여태까지 <추노>에서 죽은 사람들은 천지호가 입 안에 엽전을 넣어줬었다. 그런데 천지호는 그 의례를 자기 손으로 치른 것이다. 이것은 천지호라는 캐릭터의 악착같은 생명력, 챙길 것은 챙기고야 마는 소름 돋는 근성을 적절히 표현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천지호 역을 맡은 성동일이 스스로 만든 설정이라고 했다. 이 설정으로 천지호의 죽음은 참으로 절절하게 그려졌다. 손꼽히는 추노의 명장면 중 하나였다. 나는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동전 케이스에 넣었다. 악착같이 오래 달리라는 염원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인사였다. 다음 날 중고차 매매상에서 차를 받으러 왔다.      


“흠집도 없고, 차를 깨끗이 탔네요.”

“운행을 많이 안 해서 깨끗할 뿐입니다.”

“차는 적당히 달려야 고장이 덜 납니다.”

“그래서 파는 겁니다. 적당히 달리라고요.”

“세차까지 하셨어요? 세차했다고 가격이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했을 뿐입니다. 기름도 조금 넣었고요.”

“애정이 많은 차였나 봅니다.”

“애정보다는 나의 마지막 차인 것 같아, 잘 보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시동 소리와 함께 친구는 몸을 살짝 떨었다. 우측 방향지시등이 깜박거리며 차는 우회전했다. 깜박이는 뒷모습이 나에게 윙크하는 것 같았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내가 사랑했던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나는 서 있었다. 그렇게 나는 친구를 잘 보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도, 추억도 아닌 회억을 아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