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나'만' 특별한 건 아냐
”내가 더 이상 어릴 때 생각하던 것처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가끔 이런 말을 한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나는 어리둥절하고 머리가 복잡해지지만 대충 '맞아, 그렇지, 그렇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마시던 걸 꿀꺽 삼켜버린다.
그런 얘기들에 충분히 공감할 만한 나이지만 맞장구에는 영혼이 없다.
애초에 내가 대단한 뭔가가 될거라는 생각을 하지않았다.
장래희망에 '화가'라고 적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중학생 정도부터는 고시생, 회사원 이런 걸 적어냈다.
그렇다고 아주 현실적이고 깊고 진지한 고민에서 우러나온 그런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내가 기분이 좋으려면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은데 '회사다니면서 그림그릴 수 있을 것 같아'와 같은 단순한 이유였다.
'화가'라는, 내 그림을 파는 것 만으로 밥도 먹고 부모님 생일선물을 드리고, 옷도 사고 가구도 사고 집도 사고 차도 살 정도로 알차게 돈을 버는 대단한 직업을 (굳이 화가가 아녀도 버거운 일이긴 하다) 장래희망으로 야망 차게 유지할 수 없었다. 그게 가능해? 이렇게만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나의 재능과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는 울적한 어린아이였냐 하면 그런 것과는 반대로 내일은 모르겠고 오늘의 한 치 앞만 보는 천진하고 어리숙한 보통 사람이였다.
대단한 뭔가가 아니더라도 기분 좋을 무언가만 있으면 나는 나에게 계속 특별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20년도 넘게 흘렀지만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 것이 30대가 되면 무심결에 해 버리는 그 대사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라 생각한다.
내가 특별한 무언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 생각도 없다.
뭔가가 될 수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를 않는다.
그냥 그렇고 힘들고 무섭거나 슬프거나 찐따같아 울적하다가도 좋아하는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나아지는 나를 나는 특별하게 여기고 싶다.
내가 그러고 싶다. 다른 이에게 나를 특별히 여겨달라고 요구하고 싶지 않다.
북유럽 사람들에게는 ‘얀테의 법칙’이라는 마음 속의 규율 같은 게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읽어버리면 숨막히고 무서운 내용이지만 내가 뜻을 이해한 바로는, 남보다 '더' 특별하고 잘나고 똑똑하고 대단하다고 착각하고 싶은 마음을 엄격히 다스리는 계명이다.
내가 너보다 더, 나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스스로를 특별히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척'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 해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바라게 되는 것이다. 나름 생존을 위한 것일 수 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잣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걸쳐져 있었고 내가 '더 낫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어야 가치 있는 인간이 되므로.
나는 얀테의 법칙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지도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를 특별히 여기는 것과 나'만' 특별히 여기는 건 매우 다른 의미다.
내가 나로서의 나를 좋아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길 바라고 앉아있지 않아도 된다. 특별대우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된다. 그럼 많은 것들이 편해진다.
누군가 우러러보는 드높은 고깔모자를 많이 가졌다고 남 앞에 우쭐할 필요가 없고, 대우해주지 않는다며 화를 낼 필요도 없다. 나보다 더 많은 고깔모자를 가진 사람을 질투하지 않아도 된다. 고작 다 낡은 것 하나 가졌으면서 그런 본인에게 만족하는 것만 같아 꼴사나운 친구의 인생에 끼어들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
반대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 남에게 악해지지 않아도 되고, 약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쭐한 것도, 질투하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비굴해지는 것도 모두 당 떨어지는 일이다. 열량 소모로 치면 100미터 달리기 쯤 되지 않나 싶다.
그 힘과 노력을 나를 특별히 여기는 데에나 쓰자 나야. 나 나 잘하자.
-나는 특별해... 나는 특별하다고 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