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y bien, vamos!(좋아, 이제 가자!)”
마지막 짐까지 기차에 싣고 나서야 집주인 할아버지 후안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훔쳤다. 임시 거처였던 마드리드 외곽 한인 숙소에서 시내 중심 하숙집까지 혼자서도 갈 수 있다고 정중히 거절했으나, 60대 노인은 한사코 자신이 그 먼 곳까지 데리러 오겠다며 성화였다. 그 고집에 자가용이라도 끌고 오나 싶었지만, 몸만 달랑 와서 땀을 뻘뻘 흘리며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기차는 어느덧 출발 신호를 알렸고, 자리에 앉아서도 숨을 몰아쉬는 후안이 왠지 짠하게 느껴져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졌다. 해외 생활이 처음인지라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참이었다.
기차에 오른 뒤 한 시간여가 지났을 무렵. 시내 중심부에 다다른 우리는 비탈길과 평지를 반복해 걸으며 하숙집에 도착했다. 하숙집은 한눈에 봐도 연식이 오래돼 보이는 낡은 아파트였다. 되도록 옛 양식을 유지하려는 유럽 국가답게 엘리베이터 따위는 없었다. 우리 둘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끙끙대며 4층까지 올랐다.
여기저기 흠집이 많이 난 목제 현관문을 끽하고 여니 집주인 할머니 베아트리스가 우리를 반겼다.
“Hola, Cariña!(어서 와, 얘야!)”
베아트리스는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아직은 낯선 Dos besos(스페인식 볼 뽀뽀 인사)를 나누고 어색한 미소로 응답했다. 집 안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겼고, 아침부터 땀 흘리며 고생한 후안과 나는 그 냄새에 매료됐다.
“우리가 처음 만나는 날이니까 음식을 했단다. 일단 짐은 방에 넣어두고 같이 먹자.”
베아트리스는 이렇게 말하며 우리를 부엌으로 이끌었다. 정(情) 하면 한국 사람이라지만, 스페인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다는 것을 그날 하루에 여러 번 느꼈다.
겨우 네 사람이 구겨 앉을 법한 좁은 주방 안 식탁 위에는 스파게티 면과 미트볼 소스가 놓여있었다. 베아트리스는 연신 부엌일을 하느라 바빴고, 나와 후안은 시장을 반찬 삼아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어른이 먼저라며 후안에게 음식 떠가길 권유했으나, 손님이 먼저라며 사양하는 탓에 내가 먼저 음식을 덜어갔다.
어디서였던가, 유럽 사람들은 식탁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고 들었다. 이를 증명하듯 후안은 밥을 먹으며 끊임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스페인어가 서툰 나를 위해 짤막한 교습을 해주기도 하고, 마드리드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을 추천해 주기도 하고, 근처 마트에서 식재료를 잘 고르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후안은 처음 만난 외국인 학생에게 해줄 이야기가 아주 많다는 듯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Sí?(봤지?) 여기서는 수돗물을 마셔도 된다니까!”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돗물을 컵에 따라 마시고는 스페인의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몸소 검증해 보이기도 했다. 한껏 상기돼 시연까지 해주는 그 모습이 어쩐지 우스꽝스러웠다. 그 친절과 온정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경계심은 눈 녹듯 사라졌다.
베아트리스가 추천할 만한 와인을 슈퍼에서 사 왔다며 한 잔, 두 잔 따라 주기도 했거니와, 식탁에서 한참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니 긴장감은 저 멀리 물러갔고, 단숨에 졸음이 몰려왔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고 하품을 참아 가며 후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인지 베아트리스가 오늘은 그만 마무리하자고 했다. 구세주 같은 그녀의 말에 시간을 확인하자, 늦은 점심을 알리던 시곗바늘이 늦은 저녁을 알리는 위치로 이동해 있었다. 후안은 아직도 못다 한 말이 남았는지 입술을 옴짝달싹해 보였으나, 이내 “그래,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겠네.” 하고 한 걸음 물러섰다.
자리를 정리하고 방으로 향하려는 나를 붙잡고 베아트리스는 “잘 자렴.” 하며 포옹해 주었다. 이방인이 되어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낯선 포근함이었다. 마음의 빗장은 완전히 풀어졌고, 쏟아지는 잠에 취해 처음 누워 보는 침대에서 보드라운 이불을 꼭 껴안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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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이방인이 되어 그 푸근함을 느낄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