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아프지? 나처럼
나는 상대를 아픈 눈으로 바라보는 아주 오래 된 '잘'못된 습관이 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는 내 아이들을 아픈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 이전에는 내 남편이 남자친구였을 적에.
그 전전에는 동료들, 친구들, 그리고 내 동생과 엄마.
우리 엄마는 일찍 이혼하시고 어린 두 딸인 나와 동생을 키우느라 여자의 몸으로 이혼이 흔치 않았던 그 시절을 이 악물며 버텨내셨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내 동생은 아빠도 없이 컸는데 생업으로 바쁜 엄마의 빈자리도 컸기에 언니라고 나 하나뿐이라 내가 하는 건 뭐든 다 따라하고 쫓아다니며 컸다. 얼마나 외롭고 사랑이 고팠을까. 어린것이. 쯧쯧.
이른아침, 학교에 등교했더니 내 친구가 집에서 엄마아빠한테 혼났다고 했다.
지난 번 성적이 안 좋아서 큰 언니랑 비교당하면서 혼나고 서럽다고 털어놨다.
에구, 안타까워라. 그 마음 나도 알지. 공부하기 진짜 힘들지.
회사에서 실장님한테 실컷 깨진 대리님이 내 자리로 다가왔다.
본인이 지금 출장을 가야하는데 지급품의서 하나만 대신 작성해 달라는거다. 자존심도 상하고 멘탈이 흔들릴텐데 출장까지 가야한다니 자괴감이 들겠네. "네~ 그건 제가 해서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고맙단 말도 없이 대리님은 사무실을 떠났다.
회사에서 만난 남자친구가 남편이 되었고, 함께 살면서 나는 남편에게 좋은 아내가 되어주고싶었다. 결혼 한 남자의 일생은 돈벌어 오는 기계가 되는 것 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우리나라 남자들이 얼마나 희생을 강요당하며 사는지 안타깝고 불쌍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가장으로써의 체면을 세워주고 싶었다. 우리남편은 날 착하다고 좋아했고, 나같은 여자를 어디가서 만나냐며 행복해했다. 그리고는 DSLR을 사서 주말이면 혼자 출사를 다니고, 자전거를 타고, 때때로 낚시를 갔고, 골프를 쳤고, 헬창이가 되어 프로필 사진을 찍기도 하는 등 나 혼자 사는 라이프를 누렸다.
첫 아이 임신 6개월차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 부부는 시댁으로 합가를 하였다.
함께 살다보니 평생을 시집살이하신 시어머니가 안쓰러웠다. 어머니도 여자였고, 여자의 일생에 한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은 시집살이였고, 그때까지도 시할머니와 함께살며 어머님의 시집살이는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안쓰러워서 이맘때면 혼자 매실 20키로, 설탕 20키로를 16키로그램을 육박하는 생후 이백일 된 아들의 유모차 밀며, 이고 지고 시댁에 가서 매실청을 담그고, 저녁마다 맛난 거 해드리겠다며 요리를 해댔고, 어머니 누워보세요~ 하고 얼굴에 마사지와 팩도 해드렸다.
어머니가 옥상에 빨래라도 널으러 가시려치면, 벌떡일어나서 아이고 저 주세요! 하고, 어머니가 빌라 계단청소를 하실 때는 만삭의 몸으로 마대걸레를 뺏어서 1층부터 4층까지 열심히 물걸레질을 하였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가 힘드실까봐 정. 말. 어머니 뒤만 졸졸 쫓아다니며 2년 반동안 시집살이를 자처했다.
자식을 낳고 나니 자식에게 내가 유년시절 겪은 상처들을 비춰보기 시작했다.
남편이 개인 취미생활로 바쁠 때면, 아빠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 상실인지 아는 나는 내 아이가 나처럼 애정결핍이 생길까봐, 때때로 가슴이 울컥하고 뜨거워 진다거나, 실체모를 서운함을 느낄까 상처가 될까 전전긍긍하였다.
아이가 갖고싶은게 있다고 해도 다 사주면 안된다는 훈육의 이론을 공부하면서도 막상 아이가 약국 진열대 앞에서 카봇 비타민을 사달라고 드러누우면, 어린 시절 돈이 없어서 친구들 다 갖고노는 다마고치 하나 없던 나의 어릴 적이 생각나서 결국은 약값보다 비싼 그 것들을 사주었다.
남들이 내가 살면서 겪었던 일들 처럼 아프기라도 할까봐, 상처받으면 괴로워할까봐 ,
모든 고통을 이미 다 알고있기라도 하듯 나는 그들이 어찌 될까봐 내가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처를 공감해주고, 다 보듬었다.
그러면 그들은 나에게 말했다.
고맙다고.
넌 정말 착하다고, 이렇게 얘길 들어주니 힘이난다며.
그렇게 떠나가버린 사람들도 있었고, 되려 나에게 더 많은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걸 내가 감당하려고 했던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이 벅찬 상황이 되면 무기력해졌고, 내 무능함을 탓하며 좌절하고 하염없이 무너져버렸다.
죽고싶었다.
솔직히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어 울고싶었다.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는데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혼자 애키우느라 힘들 우리 엄마가 슬퍼할테니까. 난 아빠같은 언니인데, 내가 무너져 버리면 동생에게 아빠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질 것 같아서.
그 친구에게 친구가 나밖에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나라도 그 친구의 맘을 헤아려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시어머니에겐 네 명의 딸과 두 아들이 있음에도 어쩐지 시어머니가 잃어버린 삶을 내가 보상해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늘 마지막은 이런 마음이었다.
나는 내 마음을 외면했지만, 때때로 내가 기대고 싶은 심리를 남들이 나에게 기대게 함으로써 해소하고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의 고통을 완벽하게 해소 하는게 아니었기에 나는 점점 위축되었고, 소극적이었고, 자신감을 잃었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 되어갔다.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상대방을 대할 때 그들을 아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로 한바탕 난리를 치고, 모두가 그랬듯 나 역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곪을대로 곪아버린 마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상담센터에 데려갔는데, 문득 이건 아이가 잘못된게 아니라 내가 잘못 된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상담을 시작하면서 나는 남들보다 내 밑마음의 소리를 듣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위에 쓴 글 역시, 내가 상담을 10회 20회 진행 할 수록 객관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었다.
아아.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