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지친 초보엄마들이 이웃과 친구를 만드는 법
김지혜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여성들을 코칭하는 10년차 라이프코치이다. 엄마가 된 후 주로 초보엄마들에게 강의하고 코칭하고 글쓰고 있다. coachjihye@naver.com
친정엄마는 아이 넷을 집에서 낳으셨다. 병원 출산이 본격화되기 직전이었다. 그중 하나는 ‘역아’이기까지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위험한 일이지만, 그땐 그게 자연스러웠다. 그 때마다 번번이 아버지는 안 계셨다(육아 현장에서 남편의 부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대신 엄마의 곁을 지켜 준 것은 이웃이었다. 주인집 아줌마, 반장 아줌마, 슈퍼 아줌마 등 그때그때 소식을 들은 이웃들이 달려와 엄마의 손을 붙잡아주고, 미역국을 끓여주고, 무섭고 외로운 산모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일손을 덜어줄 할머니, 삼촌, 이모 하나 없었지만(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80년에도 3대 이상 가구는 12.6%에 불과하다), 그래도 그때 엄마들이 독박육아라며 아우성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웃과 골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겐 문 밖만 나가도 눈인사 나눌 이웃이 있었다. 반찬을 나눠 먹고, 멸치 똥을 함께 따고, 속닥속닥 남편 흉을 함께 볼 이웃 덕에 엄마는 네 아이 독박육아의 고단함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골목이 엄마의 품을 덜어주었다. 튀어 나가기만 하면 다른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골목에서 우리는 “밥 먹어!” 하는 엄마 소리가 들릴 때까지 주구장창 놀았다. 소독차가 지나가면 너나 할 것 없이 뜀박질을 했고, 한겨울에도 곱은 손 불어가며 구슬치기를 했다. 땡볕에서도 고무줄놀이는 이어졌고, 싸움이 시작되어도 어른의 중재 없이 우리끼리 어떻게든 해결을 봤다.
추억이 아련한 만큼, 눈앞의 현실은 차갑게 느껴진다. 아이를 키우면서는 멀리 나가기 힘드니 가까운 곳에서 이웃을 만들려고 놀이터에 나가봐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일 때가 많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골목과 자연의 자리에 고층 빌딩과 상업시설이 들어섰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울면 ‘무슨 일 있냐’고 걱정하는 게 아니라, ‘시끄럽다’고 인터폰이 울린다. 날 궂은 날 아이와 갈 수 있는 곳이라곤 마트와 키즈카페밖에 없다. 거기서도 장난감 사달라, 간식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와 실랑이하는 건 엄마 몫이다.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는 남편은 남편대로 밖에서 장시간 노동과 경쟁의 압박에 시달리고 들어와 쉬고 싶어 한다. 사람 사이의 접촉은 사라졌고, 연결은 끊어졌다.
엄마라는 극한 직업
몇 년 전부터 엄마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단어 ‘독박육아’부터 군대육아, 극한육아, 전투육아 등 요즘 육아에 붙은 수식어들을 보면 엄마들이 얼마나 힘든지 한눈에 보인다. 라이프코치라는 직업상, 다른 엄마들을 만나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극한 직업’ 중 하나가 대한민국의 아기 엄마가 아닐까 싶다.
‘독박육아’에는 엄마들의 외로움이 묻어 있다. 만나자는 사람, 만날 수 있는 사람 하나 없이 종일 아이와 씨름해야 하는 엄마들, 집 앞 놀이터에 나가 봐도 친구 하나 만들기 힘든 엄마들, 가족들 심지어 남편에게서도 온전한 이해와 공감을 받기 어려운 엄마들은 외롭다. SNS에 올라오는 싱글 친구들과 예전 직장동료들의 화려한 사진, 엄마표 미술놀이와 영양소 골고루 갖춘 데다 예쁘기까지 한 엄마표 요리 사진들 틈바구니에서 엄마들의 외로움은 더 짙어진다. 그 외로움은 아이마저 잠든 밤이 되면 스멀스멀 가슴을 뚫고 나와, 맥주 한잔이라도 마셔야 잠이 들게 한다.
‘독박’은 고스톱에서 패자 한 명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다는 뜻이다. 그 단어에는 엄마들의 억울함도 담겨 있다. 왜 똑같이 교육받고 직장생활 했는데 육아는 토론과 합의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당연히 엄마의 몫인지, 왜 같이 낳았는데 아이의 감기부터 어린이집 문제까지 엄마만의 소관이 되어버렸는지, 왜 맞벌이를 하는데도 살림은 고스란히 엄마의 책임인지, 프랑스나 핀란드처럼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은 안 만들어주면서 왜 정부는 무턱대고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지, 엄마들은 억울하다. 그런 엄마들에게 ‘낳았으면 키워야지, 그럴 거면 왜 낳았냐’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엄마들이 알았겠는가. 육아가 이렇게 힘들고, 모든 책임이 자기에게 돌아올 줄을. 공부하고 일하느라 직간접 체험이 없으니 닥치기 전에 알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의 엄마들은 분명 이전 세대보다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워졌고, 더 많이 배웠고, 더 풍부한 세상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젊은 엄마들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때는 어땠는지 아느냐…”라는 말로 일장 연설을 시작하시는 어머니 세대처럼 맨몸으로 가사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늘 같은 남편 밑에서 숨죽이며 사는 것도 아니고,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엄마들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에 몰두했다. 무엇이 힘든지를 알아야 해결책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찾아낸 원인들 중 중요한 한 가지는 ‘고립’이다. 엄마들은 일단 나갈 수 있는 시간, 장소, 그리고 사람이 제한된다. 이 갑작스런 고립은 당황스럽다. 출산 전까지 금요일 밤이면 번화가에서 불금을 즐겼고, 동호회 한두 개쯤은 속해 있었고, 여름이면 해외로 휴가를 떠났던 그녀들이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도 행동반경이 넓지 않았고, 밭 매고 아궁이에 불 때다가 시집간 우리의 엄마들과 달리, 지금 엄마들은 출산 이후 이 모든 자유와 관계에서 단숨에 멀어지게 된다. 관계의 단절, 사회와의 단절, 일과의 단절, 문화생활과의 단절은, 그 모든 것을 당연히 누리던 지금의 엄마들에게 크나큰 박탈감을 안겨준다.
나의 고립 탈출 분투기
나의 짧은 육아 역사 5년은, 단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온라인 육아카페를 드나들었고, 오프모임이 있으면 먼 거리를 마다않고 아이를 데리고 나가 어울렸다. 서울시 마을공동체사업의 지원을 받아 부모커뮤니티도 두 차례 했고, 마을미디어 활동으로 팟 캐스트도 만들었다. 숲놀이 팀 멤버로 활동도 해보고, 집 근처 엄마들과 팀을 만들어 추진해보기도 했다. 내향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어린이집 엄마의 전화번호를 물어 집에 초대해 친구가 되기도 했다. 가치관이 통하는 엄마들을 찾아 헤매다가 아예 도심 속 마을공동체인 성미산 마을로 이사를 오기도 했다.
그 여정이 늘 좋기만 했던 건 아니다.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커뮤니티 활동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져서 황급히 발을 뺀 적도 있었고, 동네 엄마들과의 숲놀이는 그룹 역동이 살아나지 않아 시들해지다가 결국 유야무야되었다. 어떤 모임에서는 열심히 매진했다가 오히려 단단히 상처받고 한동안 동굴 속에서 웅크리고 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왜 이렇게 관계에 서투를까’ 자책감이 들었고, ‘나 때문에 아이가 친구를 못 사귀면 어쩌나’ 걱정되고 미안한 감정에 빠졌다.
그러나 갈등 때문에 힘들다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지만, 관계는 상처 이상으로 에너지도 주기 때문이다. 아이가 세 돌이 조금 넘었을 무렵이다. 볼 일이 있어서 아이와 멀리 외출해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람이 찼고 해는 지고 있었다. 점심도 대충 먹인 아이에게 ‘빨리 저녁 해먹여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한데, 내 마음 이해할 리 없는 아이는 세월아 네월아 느리기만 하고,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10여 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지칠 대로 지쳤는데 집에 가서 밥 짓고 반찬 만들어 먹일 생각하니 까마득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밖에서 먹여도 될 것을, 그땐 두 끼 이상 바깥 밥을 먹이는 게 왜 그리 용납이 안 되었을까). 그런 와중에 맡겨둔 짐 찾으러 잠깐 들른 이웃집 엄마가 내 상황을 눈치 챘는지 들어와서 밥 먹고 가라며 손을 잡아끌었다. 못 이긴 척 들어간 집에서 대접받은 따뜻한 닭죽 한 그릇에 내 마음은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 엄마는 ‘차린 것 없다’고 겸손을 떨었지만, 나에게 그 죽 한 그릇은 아직 남아 있는 ‘정’의 상징이었다.
관계를 빚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지 서너해, 그 시간이 나에게 남긴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문득 얼마 전 한 일요일의 기억이 떠오른다. 남편이 일보러 나가 없는 사이 몸이 갑자기 아파오기 시작했다. (출산이후 이유를 모르게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증상이다.) 아이에게 영상을 틀어주고 옆에서 쉬었는데 증상이 점차 심해졌다. 곧 저녁식사 시간이 다가오는데 몸이 물먹은 솜마냥 축축 가라앉았다. 예전 같으면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뭐라도 챙겨 먹였겠지만, 나는 이웃의 친한 엄마에게 SOS를 쳤다. 그 엄마는 당장 집으로 달려와 우리 아이를 데려가 주었다. 아이는 그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재미있게 놀다가 잠자기 직전에 남편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사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어 푹 쉴 수 있었다. 믿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이웃 덕분에 나는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몸의 소리를 들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아프거나 바쁠 때 이웃은 아주 요긴하다. 그러나 단번에 그런 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신뢰는 평상시에 꾸준한 정성을 쏟아야 쌓인다. 대단한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집으로 초대해서 집밥 해먹이고, 놀러 갔을 때 설거지 해주고, 고민을 말하고 듣고, 날 좋을 때 도시락 싸서 함께 나들이 다니고, 안 쓰는 장난감이나 살림살이 넘겨주고, 좋은 정보가 있을 때 나누고, 내 아이 못지 않게 이웃의 아이도 챙기는 등의 소소한 노력들이 관계를 탄탄하게 이어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람과 공간
예전보다 물리적 환경이 나아졌지만, 고립과 단절은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니 외롭고 지친 우리 엄마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람’이 아닐까? 사회가 척박할수록, 어깨의 짐이 무거울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야 한다. 지금 엄마들은 이미 너무 많이 노력하고 있다. 모든 것을 혼자, 그것도 ‘잘’ 해내려고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들 혼자서는 결코 아이를 다 책임질 수 없다. 우리에겐 아이가 아플 때 체온계를 빌릴 이웃, 택배를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할 이웃, 친정에서 보내온 음식이 많을 때 나눠먹을 이웃, 여행가는 동안 키우던 물고기를 맡길 이웃이 필요하다. 나아가 우리에겐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를 얻을 친구, 힘들다고 투정 부릴 친구, 잘 해낼 수 있다고 격려해줄 친구가 필요하다. 지지고 볶고 어울릴 안전한 관계가 필요하다.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비용 부담 별로 없고, 날이 좋으나 궂으나 갈 수 있는 그런 아지트 말이다. 가서 눈 마주치는 엄마와 아이 이야기도 나누고, 좀 더 친해지면 남편 이야기도 나누고, 더 깊어져서 서로의 집으로 왕래를 틀 기회를 만드는 곳. 그런 곳이 좀 더 많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육아종합지원센터나 도서관 안에 아이들과 갈 수 있는 공간이 조금씩 늘어나곤 있지만, 집 가까운 곳에 시끄럽게 떠들어도 괜찮은 공간이 필요하다. 아파트 단지 내에, 동 주민센터 안에 그런 공간이 하나씩만 생겨도 아이 키우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엄마에게 이런 친구들과 공간이 생긴다면, 가장 혜택을 보는 것은 아이들일 것이다. 엄마들이 아무리 놀이법을 배워서 놀아준다고 한들, 친구만 하겠는가? 엄마는 ‘놀아주’지 않고 ‘놀’려고 애를 쓴다지만, 엄마의 노력이 무색하게 친구만한 재미를 주지는 못한다. 힘드니 그만하자는 법 없고, 정리하고 놀아야지라며 잔소리하는 법 없고, 위험하다며 제지하는 법 없고, 방구 뿡뿡만 해도 까르르 넘어가고, 비밀 이야기를 속닥거릴 수 있는 친구. 그리고 그 친구와 어울릴 공간. 이것을 아이에게 선물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눈빛만으로도 통한다. 여유롭게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싱글 친구, 아이를 낳아보고 육아를 전담해보지 않은 남편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가 안 가는 애환이, 같은 엄마들끼리는 쉽게 통한다. 먼발치서 유모차를 끌고 가는 무표정한 엄마도, 마트에서 떼쓰는 아이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엄마도, 고운 화장에 반듯하게 차려입고 아이를 등원시키는 워킹맘도,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아이 때문에 고민하고, 육아 때문에 힘든, 같은 엄마들이다. 그 엄마들과 소통하고 연결되면, 육아의 짐은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엄마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같은 단지에 인사하고 지내던 한 엄마의 자살을 목격한 뒤로, 나에겐 자살이 남 일 같지가 않다. 여섯 살, 두 살 두 아들을 키우고 있던 그 엄마는 남편의 잦은 퇴사와 아이들 교육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고 나왔을 때 남편으로부터 위로와 지지는커녕 ‘뭐가 그렇게 힘드냐’며 타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가 얼마나 외롭고 절망스러웠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처음 엄마의 길에 들어선 우리는, 모두 초보다. 초보이기에 어설프고 좌충우돌하는 게 당연하다. 그 역할이 힘든 것이 당연하다. 어설프고 힘든 게 부끄럽다고 꽁꽁 감추고 혼자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내 육아를 하다 보면 결국 번아웃 된다. 그러기에 출산 일 년 사이에 열 명 중 아홉 명의 엄마들이 산후우울감에 시달린다. 그 우울감이 깊어지면 우울증, 나아가 자살로도 이어진다. ‘혼자’라는 것이 누군가에겐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나처럼 도심 속에서도 고립육아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한 엄마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힘든 현실을 불평하며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사람과 공간을 찾아 도전하는 엄마들, 관계에서 필연적인 갈등을 직면하고 넘어서고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연합’육아를 펼쳐나간 엄마들, 그들의 생생한 스토리가 펼쳐진다. 나만 유난스러운 게 아닐까 싶었기에 이 책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지금도 좁디좁은 아파트 한 구석에서 아이와 둘이 씨름하고 있을 이 땅의 수많은 초보엄마들에게 부디 이 책이 가 닿길 바란다. 그래서 그들이 육아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엄마들과 연민과 연대감을 느끼고, 세상으로 걸어 나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 그래서 엄마들이, 그리고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이 그 첫걸음을 뗄 용기를 줄 것이다.
* 격월간 교육잡지 민들레의 단행본 <마을육아> 서문에 실릴 글입니다. (3월 말 출간 예정)
산놀이 멤버들과의 겨울산 나들이. 흙밭에서 뛰놀던 아이가 달려왔다.
밤송이 가시가 박혔단다.
엄마들 아이들 모두 둘러싸고 가시를 빼는데 초집중.
하나도 안 빠졌지만, 관심과 애정에 아이는 마음이 풀렸고,
아이는 아픈 건 잊은 채 밴드 하나 붙이고 다시 뛰어나갔다.
함께라면, 얼음 두꺼운 강물도 좋은 놀이터.
평소에 거들떠도 안 보던 땅콩과 호두도 최고의 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