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를 쓰고 노력하는 나보다, 아이가 더 잘하는 것
나는 오랜 시간 나를 꾸미고 살았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한심하게 보일까 봐, 버림받을까 봐 괜찮은 사람인척 위장했다. 상처 따위는 받지 않는 강한 사람인 척했다. 공부를 잘하면, 멋진 일을 하면, 돈을 잘 벌면, 날씬하고 예쁘면 사랑받고 인정받을 줄 알았고, 그 지점에 도달하려고 늘 애쓰며 살았다. 20대가 그렇게 흘러갔다.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며. 사랑을 바라서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도 모르며.
나의 ‘가면’을 자각한 것은 코칭을 배우면서였다. 꾸미지 않아도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안다고 믿어지는 건 아니지만, 내 안에 보석이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나에겐 충격이었다. 그것을 찾아 그때까지 여러 나라를, 여러 사람을 전전해 왔으니까. 그 많은 도전의 시간들이, 내 안의 허함을 채우기 위한 발악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부모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일을 못해도, 똑 부러지게 말을 못 하여도, 관계에서 매력적이지 않아도, 목표 달성에 실패해도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나도 가치 있는 존재라 말할 수 있을까?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일이나 관계에서 무엇보다 밑바탕이라는 걸 알게 된 나는, ‘자기사랑’이라는 꽤나 난해한 과제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그 작업은 정성과 인내가 필요했다. 나는 수시로 ‘자기 비난’으로 돌아갔다. ‘이것도 못해’, ‘네가 그러고도 코치냐’, ‘넌 안돼’와 같은 내 안의 익숙한 비난의 목소리들과 싸워야 했다. 어떤 땐 싸움에 지고선 몇 날을 쓰러져있기도 했다. 어떤 땐 그 목소리가 진실인 것처럼 믿어져서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기를 5년 차. 나는 엄마가 되었다. 나의 약한 면, 나의 부끄러운 면과도 어느 정도 화해를 한 터였다. 내 안에도 반짝거리는 보석이 있다는 걸 조금은 받아들이게 된 터였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그 지난한 과정을 수년째 해오던 나로선, 아이의 자존감을 무조건 지켜줘야겠다는 다짐이 당연했다.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겪게 하고 싶진 않은 게,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아니던가?
나는 아이에게 있는 사랑 없는 사랑 다 끄집어내 주었다. 틈만 나면 아이 몸 곳곳을 쓰다듬으며 “우리 시원이는 눈도 이쁘고, 코도 이쁘고, 어머 손도 이쁘네.”라며 아이의 몸을 칭송했다.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가능했다. 바닥에 누워서 팔다리를 파닥거리거나, 치발기에 침을 번덕을 하며 빨고 있거나, 가슴팍에 안겨 세차게 젖을 먹다가 입을 헤벌리고 잠드는 아기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물론 사랑하지 못하는 엄마도 있다. 그 경우엔 해결해야 할 심리적, 환경적 문제가 있는 것일 뿐이다.) 하도 이쁘다고 하니까 어느 날엔 가는 동생이 “언니야, 객관적으로 한번 봐봐. 정말 그렇게 이뻐?”라고 물을 지경이었다.
밤이면 품 안에서 안겨 있는 아기에게 말해줬다. “시원아. 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특별하고 소중한 아이야. 네가 공부를 못해도, 다른 사람보다 뒤 쳐 저도, 엄마 말을 안 들어도, 엄마 아빠는 있는 그대로 널 사랑해. 앞으로 네 안에 있는 특별한 능력으로 세상에 기여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다른 엄마들이 아기 발달단계에 신경 쓰고, 아기 전집을 사고 있을 동안, 나는 아기의 자존감을 다지는 작업을 했다. 아기의 무의식 깊은 곳에 새겨지도록 아기가 잠들락 말락 하는 시간에 일부러 저 말을 흘려줬다. 이것은 아이에게 전하는 당부이자,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겠다는 나의 다짐이었다.
여섯 살이 된 지금, 대체로 그 다짐은 지켜지고 있다. 아이가 불같이 화를 낼 때도 “뜻대로 안돼서 화났구나.” “그래도 엄마는 시원이 사랑해.”라고 덧붙이곤 한다. “엄마 미워. 엄마 던져버릴 거야.”라고 얼굴 잔뜩 찌푸리며 소리를 지를 때에도, “엄마한테 뭐가 속상한 게 있었어?” “엄마는 화내는 시원이도 사랑해.”라고 하곤 한다.
물론 아이한테 화를 낸 적이 없다면 그건 사람이 아닐 게다. “한 자리에 앉아서 먹자”를 너다섯번을 되풀이해도 다시 일어 나돌아 다니며 먹을 때, 화 안 내고 버틸 수 있는 엄마가 얼마나 될까? “엄마가 지금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라고 소리 높여 말하고 나면 아이는 대개 빛의 속도로 자리에 와서 앉는다. 주눅 든 아이에겐 꼭 반창고를 붙여준다. “엄마가 소리 지른 건, 시원이 행동에 화가 나서야. 시원이를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야. 알지?’
얼마 전엔, 아침에 일어난 아이가 칠판에 그림을 그리다가 실수로 그림 한쪽을 지워 버리고 선불 같이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자기가 실수해 놓고, 그것도 별 것도 아닌 실수에, 심지어 바쁜 아침 시간에 징징대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를 보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이런 경우 무시하거나 설득해봤자 시간이 더 걸릴 거라는 걸 알기에 정공법으로 응수해줬다.
“그림 한쪽이 망가져서 속상했구나.”
“엉엉…. 너무 속상해.”
“지워진 부분을 다시 그리면 어떨까?”
“난 이게 최대한이야. 더 이상 못해.”
뜻밖의 말이었다.
“실수한 시원이가 밉고, 더 이상 해볼 자신이 없어?”
“어 시원이 미워. 시원이 싫어.”
고작 4돌을 넘긴 아이 입에서 나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말. 난 자신이 밉다는 아이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나 자신이 오랜 시간을 헤맸고, 아이는 결코 들어가지 않았으면 했던 감정의 늪. 거기에 아이가 발을 담그려 하고 있었다. “널 미워하면 어떡해. 널 사랑해야지”라는 교과서적인 말로 아이의 마음을 돌려주고 싶은 유혹이 치밀어 올랐다. 다행히 위기를 넘기고선 말했다.
“우리 시원이가 실수한 게 너무 후회되나 보다. 그래서 시원이가 밉기까지 한가 보네.”
엄마가 자기 마음을 알아주니까 아이는 더 격렬하게 표현했다. 그래 맘껏 울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속상한 감정을 삭이지 말고, 그 감정이 주는 메시지를 들으렴. 몇 분이 흘렀을까. 아이의 울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아이에게 말했다.
“우리 시원이가 실수가 용납이 안되었나 보다. 그래도 엄만 실수한 시원이도 사랑하는 걸?” 아이의 눈이 반짝이고 나는 말을 이어나간다. “엄마는 시원이가 자기를 미워해도 사랑해. 시원이가 실수해도, 이렇게 소리 질러도 사랑해.” 머쓱한지 아이는 시선을 돌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감정이 풀렸다.
이렇게 극적인 에피소드만 모아서 자랑삼아 말하니, 한량없이 사랑이 넘쳐나는 엄마 같이 들리지만, 내 안에 사랑이 고갈될 때는 그건 불가능한 고지였다. 바쁜 아침시간에 꾸물거리고 있을 때, 집에 갈 시간이 지났는데 더 놀겠다고 고집부릴 때, 잠잘 시간이 넘었고 나는 이미 녹초가 되었는데, 불 끄지 말라며 소리 지를 때, 육아와 살림이 전혀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 문득문득 나는 아이한테 차가워지거나, 내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어찌 보면,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에게 조건부 사랑을 줄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40년 가까이 각종 조건들에 물들어 있으니 말이다. 가만 보면 내가 주는 사랑보다 받은 사랑이 큰 것도 같다. 아이에겐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좋으니까. 엄마가 밥줄이고 생명줄이고 감정의 안식처니까. 엄마에게 학대를 받았다고 해도 그 엄마에게 매달리는 게 아이들이니까.
아이가 리본 묶는 법을 줄기차게 연습하더니 어느 날 내 운동화 끈을 묶어 준다. 아이가 옷 개는 법을 배우더니 내 옷을 정성스럽게 개 준다. 아이가 저 멀리서 뛰어와 나를 안아준다. 아이가 넘어진 나에게 “엄마 괜찮아?”하고 묻는다. 잠자리에 누운 아이가 내 목을 감싸며 “엄마 좋아”하고 볼을 비빈다. 이렇게 나는 아이에게 사랑받고 있다.
아이가 세 살 때였던가. 어른들이 격렬하게 싸우는 상황에서 아이와 몇 시간을 머물렀던 일이 있다. 내가 말려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자리를 뜰 수가 없어 아이를 거기에 뒀는데, 녹초가 되어서 집에 와 누워 아이 눈을 보니 갑자기 미안함이 밀려왔다. 소리 지르는 어른들 보며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런 자리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시원아 오늘 많이 무서웠지. 엄마가 그 자리를 빨리 뜨지 못해서 미안해.”
아이는 내 눈을 응시하더니 한 마디를 했다. “괜찮아 엄마. 수고했어.” 어디서 배웠는지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기까지.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녹아내렸다. 나의 마음 씀을 네가 알아주는구나. 누구보다 나를 배려해 주는구나.
나만 보는 아이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아이는 줄곧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좋아한다. 아이는 조건을 따지지도 않는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건, 옷을 어떻게 입었건, 무슨 일을 하건, 돈을 얼마를 벌건, 상관없이 아이는 엄마를 좋아한다. 그리고 볼에 살을 비비며 ‘엄마 좋아’를 외친다. 이런 아이에게 나는 오히려 배운다. 조건 없이 사랑하는 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