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두부 예찬
가끔은 아주 가볍게 읽을 책이 필요하다. 지하철을 탈 때 더욱 간절하다. 그때는 하루키의 수필을 읽는 게 딱이다. 하루키도 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이럴 것만 같다.
솔직히 하루키 소설에서 별 감흥을 받은 적이 없다. 생의 무료함이 느린 강물처럼 흘러가는 느낌이랄까. 이런 말을 하면 하루키 중독자들에게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루키 소설을 폼 나게 읽는 세련된 감수성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하루키의 수필집은 쉽게 읽힌다. 일단 길이가 짧고 문체는 간결하다. 스피드가 꽤 매력적이다. 그냥 바로 앞에 커피 한 잔이나, 아님 보리차 한 잔도 좋겠다. 그런 탁자에서 옆집 총각이나 이제 막 중년으로 넘어갈락 말락 하는 나이의 남자가 말을 건네듯이 제법 감칠맛이 난다.
우선 이 책은 코끼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무렴. 코끼리를 제조할 수 있는 공장이 있다면 상아가 부산물로 생길 테니 엄청나게 부자가 될 것이다. 이런 유머를 즐긴 일이 있다. 냉장고에 하마를 넣는 법. 몇 단계로 넣을지에 관한 다소 웃기는 난센스.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불현듯이 이런 난센스를 생각하면서 집어 들었는데, 뭐 그렇게까지는 하루키의 수필이 허술하지 않다.
하루키의 두부를 말해보겠다. 유명인이 무얼 잘 먹는지 들여다보는 것은 배배 꼬인 관음증처럼 언제나 흥미롭다. 두부에 관한 4편의 글에서, 삽화를 그려주는 안자이 미즈마루를 골탕 먹이려고 그리기 어려운 두부를 선택한 유머가 유쾌하다.
하루키는 스스로 두부 팬이라고 고백하듯이 두부를 한 번에 4모나 2모를 먹어치운다. 밥 대신 두부를 주식으로 하니 두부가게가 사라지는 것을 무척 아쉬워한다. 하루키가 두부를 주식처럼 먹으려면 일회용 용기에 파는 두부로는 곤란하다. 하루키도 두부가게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애석해하면서, ‘맛있는 두부의 생산을 격감시키는 국가 구조는 본질적으로 왜곡된 것’이라고 한다. 하루키 말대로 ‘두부 따위’로 국가라고 하는 엄청난 거인에게 맞짱 뜰 수는 없지만, 두부가게의 사라짐은 추억 하나가 뭉텅 잘려나간 듯 아프다.
동경에서 잠시 살 때 집 앞에 바로 두부가게가 있어서 이른 아침이나, 또 저녁거리를 위해서 오가며 김이 뜨끈하게 나는 막 만들어놓은 두부를 사다가 먹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달리 먹을 게 없어서 두부 중독자가 되었다고 하는 게 맞다. 실파를 송송 썰어 뜨거운 두부 위에 간장과 함께 끼얹어 구수한 콩 냄새를 맡아가며 단순하게 먹어도, 어쩐지 가장 한국다운 음식이 바로 두부처럼 느껴져서 늘 한국의 밥상 같았다.
어릴 적 두부장사가 딸그랑거리는 종을 울리면서 골목길에 두부 모판을 내려놓으면 일제히 문이 열리면서 온 동네의 여자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너무 일찍 나와도 안 되고 너무 늦게 나와도 안 되었다. 가장자리 두부가 다 나가고 한복판의 두부를 사게 될 때의 그 야들한 기분을 만끽해야 되기 때문이다.
두부도 이제 기업적이어서 1회용에 담아 판다. 방부제라도 들었는지 유통기한이 지나도 변치 않는 두부에 대한 소회는, 하루키가 아니어도 나도 무지 아쉽다.
하루키는 두부를 정사를 끝낸 후 먹는 게 제일 맛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한다. ‘섹시한 두부’에 관한 상상이어서, 무어라고 탓할 바는 아니다. 우리는 교도소에서 나올 때 두부를 먹는데, 하루키가 이걸 알고 있을지 궁금하다.
일본의 두부는 우리나라에서 전래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하도 두부를 잘 만들어서 전래받은 중국에서조차 오히려 우리의 두부 만드는 찬모를 보내달라는 말이 ‘세종실록’에 쓰여 있다고 하니 청출어람인지, 이제는 다시 역전되어 일본의 두부가공방법이나 포장기술까지 배워 와야 한다. 격세지감이 더 드는 두부다.
두부의 부(腐)는 썩는다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요구르트를 유부(乳腐)라 하듯이 고체이면서 말랑하고 탄력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색의 <목은집>에, 두부는 밭에서 나는 쇠고기로 알려져 예전엔 큰 사찰엔 조포사를 두고, 방앗간이 있어 떡과 두부를 직접 만들었다는 두부의 역사가 전해진다.
두부 다이어트는 하루 중 한 끼를 두부로 대신하고 나머지 두 끼는 평소대로 식사하는 방식이라고 하는데, 하루키의 두부 사랑은 혹시 다이어트 중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두부 중독자다. 나는 하루키처럼 맨 두부를 그리 먹으라고 한다면 느끼해서, 절대 사절이지만.
두부는 고춧가루를 푼 새우젓국에 넣어서 먹는 연두부가 제일 시원하고 맛있다. 새우젓과 두부가 모두 소화에도 으뜸인 식품이지만, 그 칼칼한 감칠맛은 어디 비할 데가 없다. 두부만 오로지 먹을 때의 느끼함을 상쇄시킬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인 셈이다.
하루키의 커피 인생론
열여섯에 항구가 있는 소도시에서 살았던 하루키는 밖에 비가 오는 날, 피아노 소리, 하얀 커피 잔, 이 세 가지가 커피를 제대로 마시는 법이라고 한다. 나도 그 나이에 바다가 있는 소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하루키의 말에 공감한다. 그리고 하얀 커피 잔이 싸늘하게 식어가던 그 여름, 비 오는 날의 차가운 커피에 대한 기억도 가지고 있다.
하루키가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다 주는 따스함의 문제’라는 리처드 브로티칸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끝난 커피에 관한 글이 마음에 든다. 커피는 추억에 대한 배경과 풍경을 기억하는 음식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전철표를 잘 잃어버리는 하루키. 지하철을 탈 때마다 카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몇 번이나 확인을 하는 내 어리바리를 동시에 떠오르게 한다. 후불교통카드로 바뀐 지금도 나는 내리는 동안까지 확인을 수차례 하는데, 하루키처럼 전철표를 귀속에 넣기 운동을 벌일 것을 상상해보지만 그건 영 아니다. 전철표가 칩이 아닌 다음에야......
지하철에 식당 칸이 하나 정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루키처럼 한다. 무궁화열차를 타고 방학이면 집에 가는 길에 식당 칸에 들러 공연히 우수에 젖거나 낭만적인 체한 적이 있는데 제법 무엇인가 된듯하던 때처럼, 먼 곳까지 가는 지하철이나 순환 지하철 칸 하나에 간단한 음료를 파는 식당 칸 하나 정도 놔두면 훨씬 멋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은 그냥 하루키의 식당 칸에 대한 글을 읽다가 생각한 것이다.
이른 아침 지하철을 타는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저녁도 먹지 못하고 마지막 기차를 타는 사람을 위해서 간단한 매점용 칸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곳에서 사 먹는 사람에 나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옥철 속에서 이것은 아무래도 내 허무맹랑하고 쓸쓸한 환상이다.
하루키도 학생 시절에 거리를 걷다가 불심검문을 당한 적이 있는데, 나도 학생 시절에 서슬 퍼렇던 유신 시절에 그런 경험이 있다. 그냥 폼으로 큰 가방을 들고 다니던 중이었는데 종로에서 딱 걸린 것이다. 여학생 가방 정도에서 나오는 것들만 우르르 쏟아졌지만, 그러니까 그 시대는 폼도 불심검문의 시대였었다.
밸런타인데이에 하루키는 초콜릿도 받지 못한 채, 무말랭이와 튀긴 두부를 넣어서 조림해 먹는다. 초콜릿도 받지 못한 자신이 영화 <황혼>의 헨리 폰다처럼 노인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아서 ‘아, 싫다’ 고 외친다. 문득, 밸런타인데이의 초콜릿 가게를 싱겁게 보던 나도, 앗, 한다.
초콜릿에 청춘의 연정 정도는 얹어도 좋은 것이다. ‘돈 나오는 구멍은 똑같아서’ 아내의 생일 선물도 받지 않으려고 혼자 지내는 하루키의 생일은, 아이들이 엄마인 내가 준 용돈을 모아서 받는 생일선물을 떠올리게 해서 웃는다. 돈 나오는 구멍이 같더라도 어차피 받고 기분 꿀꿀한 게 낫지 않을까.
답답하고 절망적인 시간이 많은 날들이다. 이럴 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세상이 모두 꿈속의 현실이라면 어떨까. 그래서 '세상에나, 저기 셋째 줄에 앉은 뚱뚱한 남자만 존재한다면 어떻겠는가?'라는 유머를 던졌던 우디 알렌의 말을 떠올려본다고 나아질까.
그러나 무엇이든 먹으면 목에 턱 걸릴 것만 같은 그런 날은 차라리 하루키의 수필에서처럼 말랑하고 부드러운 두부를 먹는 게 낫겠다. 막 나온 뜨끈한 두부를 이제는 구하기 만만치 않지만, 뜨거운 물에 살짝 담갔다 먹으면 두부의 그 아슴한 추억 같은 향이 살살 피어날 것이다.
간장을 솔솔 뿌리고 실파를 송송 썰어 올려 간단하게 먹는 두부 한 모는 허기를 잠시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속이 편해지고 부드러워진 순간, 또 다른 희망이 그리워져 찾아 나설 힘이 될 것이다.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무라카미 하루키,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문학동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