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릴 수 없는 사랑의 빛깔까지도』, 이중섭 서한집
겡이 죽이 제주도의 7대 향토음식 선정에 들지 못해서 아쉽다. 이중섭이 즐겨 먹던, 아니 먹을 수밖에 없던 겡이 죽이 선정되어 누구나 한 번씩 그 죽을 먹을 때면 천재 화가 이중섭을 다시 생각하고, 그의 죽음이 단지 그의 책임뿐이었을지 한번 되돌아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주도 방문 시에 이중섭 기념관을 찾은 적이 있다. 제주도에서 내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장소였다. 그 기념관 안에서 대향 이중섭이 남긴 가득한 그리움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마음이 아팠다.
이중섭은 1951년 서귀포 피난 당시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면서 반찬으로는 바닷가 갯벌에서 작은 게를 수없이 잡아먹었다. 그때 반찬으로 먹은 게에게 미안해서 게 그림이 탄생한다. 그나마 그림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 은지화로 불린다. 게와 아이들을 소재로 그린 그림. 먹어야 해서 죽인 게들은 이중섭의 그림 속에서 영원히 환생해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거나 놀고 있다.
겡이는 제주도 사투리로 게를 가리킨다. 겡이 죽을 끓이는 방법은 바닷가의 작은 게를 잡아서 절구에 넣고 빻아서 물을 섞어 체에 내린 후 불린 쌀을 냄비에 담고 저어주면서 끓인다. 이것을 깅이죽, 혹은 겡이 죽이라고 하는데, 간장염 등의 속병에도 좋은 겡이 죽은 키토산이 많이 들어있어 다리 아픈데 효과가 있다고 해녀들이 즐겨 먹었던 보양식이다. 쌀이 부족했던 제주도에서는 게를 잡아 쌀 대신 다른 곡식으로 죽을 끓이기도 했다. 제주도에서는 3월 중순에 잡은 게로 젓을 담가 먹으면 온갖 병에 좋다고도 한다.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나도 이 겡이 죽을 사 먹었다. ‘섭지 해녀의 집’에서만 판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간 나는 숙박도 그 근처서 하면서 조식으로 이 부드러운 초콜릿 빛의 겡이 죽을 먹었다. 어찌나 푸짐하고 인정 있게 한 그릇 가득 주던지 아이 셋과 함께 실컷 먹었다. 푸른 창 너머로 연한 에메랄드빛 파도가 넘실대던 제주바다를 바라보며 내가 먹던 겡이 죽은 낭만적이었고, 입 안 가득 퍼지던 고소함은 거의 환상적이었지만, 이중섭에게는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니 먹먹할 정도로 가슴이 아렸다.
이중섭이 바닷가에서 게를 잡아먹을 당시는 적어도 덜 굶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 먹는 것이 여의치 않아 이중섭의 두 아들은 영양실조에 걸린다.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의 고향으로 돌아간 후, 이중섭은 혼자 살면서 끼니도 잇지 못하는 고통을 겪는다. 불도 때지 못하는 아홉 자 냉방에서 가락국수와 간장으로 하루에 한 끼를 먹거나, 요행 두 끼 먹는 날도 있는 그런 생활을 한다. 이때 이중섭은 일본으로 떠난 아내에게 ‘좁은 방 한 칸에 두어 달 먹을 식비만 있으면 내 힘과 노력으로 하루 한 끼나 두 끼 먹고도 생활을 시작할 수 있소.’라고 하며 같이 살았으면 하고 애원한다.
그런 그의 그림 속에는 복숭아처럼 음식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전쟁 속에서 음식이 치유의 힘이었으리라. 전쟁의 비극성은 언제나 생존과 질병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중섭이 굶기를 밥 먹듯이 한 것은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가 거식증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이 책 후반부에 실린 구상의 이중섭에 대한 회고로 알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 월남한 후 남의 신세를 지다 보니 어려운 말을 하기 싫어하는 성격인 이중섭은 결국 식음 거부라는 자학 증세까지 간 셈이라고 구상은 회고한다. ‘이중섭의 병 치료란 주로 그를 붙잡아 매고 목구멍에 고무줄을 넣어 우유나 주스 등을 먹이는 것이었다’, 고 구상이 회고할 정도로 심각한 거식증을 앓는다.
이중섭의 식음 거부는 진실의 직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겁하지 않고 비굴하지 않으려는 이중섭은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것을 싫어해 음식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공으로 얻어먹기 힘든 성격이었다.
그의 편지들을 읽다 보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했던 그의 삶은 우리 역사가 빚은 비극에 위대한 개인이 처참하게 부서진 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의 비극은 그 개인만의 비극은 아니었지만, 가족과 이별해야 했고, 예술혼을 바로 펼칠 수 없었던 절망은 결국 우리 모두를 신랄하게 뒤집어 보게 한다. 이는 앞으로도 우리의 역사가 반성하고 함께 짐 져야 하는 과제일지 모른다.
7차 중학 국어 교과서 첫 단원이 이중섭 전기였다. 막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 이중섭에 대해 달달 외우면서 시험까지 쳤으니 나름대로 멋진 일이다. 교과서에 실린 이중섭의 그림은 ‘망월’과 ‘소’로 일제 시대에 태양상을 받은 ‘망월’은 애국심을, ‘소’는 의지력을 나타낸다고 아이들은 배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중섭의 사망 부분을 낭만적으로 그려, 아이들이 예술가의 죽음은 멋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걱정이다. 천재화가가 생전에 밥 한 끼 먹기도 힘들었던 생활을 했다면 누가 믿을까. 1956년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간장염과 거식증으로 이중섭은 사망했다. 무연고자로 3일간 시체실에 방치되었고, 이때가 만 40세였으니 우리 역사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살아온 천재화가의 요절치고는 정말 안타깝다.
교과서에는 이 천재화가가 역사의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밥을 얼마나 굶었는지, 그리고 거식증으로 살아가다 결국 사망에 이른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천재화가를 굶겨야 했던 우리의 가난한 역사에 대해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던지, 아니면 이 천재화가의 그림에만 감탄하느라고 그가 일상인이라는 것을 잊었던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떤 식으로 죽든 예술가들은 아직도 빈곤으로 인한 죽음조차 낭만으로 받아들이는 위험한 지역에 서있다. 예술가의 삶이라서 일반인들이 다소 외경심을 가지고 있을까.
이 책의 앞부분에는 미공개 엽서그림들도 들어있다. 가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하염없이 구름이 흘러갈 때 이 그림들을 드려다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세상은 온통 그리움으로 가득한 것 같아 가슴이 메인다. 이중섭의 가득한 그리움이 내게도 전해져 와 이 세상 그리움을 다 그려보고 싶어 질 때도 있다. 이 책이 편지글이라서 고백체이므로 그리움은 더 응축된다.
김춘수 시인의 시, <내가 만난 이중섭>에서는 더욱 그 그리움이 가슴 저미는 쓸쓸함과 서러움으로 변한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 김춘수, <내가 만난 이중섭> 중에서
끼니를 잇기도 힘들었던 천재 화가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덧붙이기가 오히려 부끄럽다. 그러나 힘겹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화가 이중섭은 굶주림과 허기 중에도 그리움을 놓지 않고 위대한 그림을 그렸으니, 그의 고매한 정신과 맑은 영혼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은 아니었던 셈이다.
사무엘 존슨은 ‘희망은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하다.’고 했다.
허기가 전염병처럼 만연하는 현실이다. 희망의 메시지를 눈 씻고 찾아봐도 힘든 시대에 희망은 주문처럼 외우고 있어야만 찾아오리란 기대감만 던진다. 아, 그 기대감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하겠지만, 이중섭은 겡이 죽을 먹었지만 우리는 또 오늘 무엇을 먹으면서 허기를 채울까.
그러나 희망에 대한 허기가 우리를 끝까지 붙잡고 놓지 않을 때, 우리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목숨 밭일 것이다.
『그릴 수 없는 사랑의 빛깔까지도』, 이중섭 서한집, 한국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