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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날다 Apr 15. 2019

‘네오리얼리즘’을 다시 생각한다!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

2차 대전 직후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의 거리. 

오랫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던 안토니오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벽보 붙이는 일자리를 소개받는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전거가 필요했다. 하지만 궁색한 살림살이 때문에 안토니오는 자전거를 전당포에 맡긴 상태. 아내 마리아는 궁리 끝에 침대 시트를 전당포에 잡히고 자전거를 다시 찾는다.      

직업을 갖게 된 안토니오네 가족들, 아내와 아들 브르노까지 모두들 기쁨에 겨워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안토니오가 출근하여 벽보를 붙이는 사이에 한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도망친다. 도둑을 쫓다가 놓치고만 안토니오는 절망감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 날부터 안토니오 부자는 배고픈 것도 잊은 채 자전거를 찾으려 로마 거리를 배회한다. 하지만 헛수고에 좌충우돌만 거듭, 별 소득이 없다. 지치고 화난 마음에 안토니오는 아들 부르노에게 손찌검을 하고 절박한 마음에 주술사까지 찾아간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도둑과 마주치고 그를 잡게 되지만 도둑이 사는 동네 사람들이 합세, 오히려 안토니오를 협박하는 적반하장의 상황에 몰린다. 결국 자전거를 찾을 수 없게 된 안토니오는 그만 자전거 훔치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잡히고 아들 부르노가 보는 앞에서 모욕을 당한다. 해지는 로마 거리, 절망감에 사로잡힌 안토니오 부자의 걸어가는 뒷모습이 이내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삶 그 자체가 영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정수     

1948년 작품, <자전거 도둑>은 2차 대전 이후 전쟁의 폐허 속에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탈리아 시민의 삶 속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이른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은 1942년 이탈리아 영화 비평가인 안토니오 피에드란겔리와 움베르토 바르바르가 처음 쓰기 시작한 용어다. 이에 대해 <자전거 도둑>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을 집필했던 시나리오 작가 세자르 자바티니는 “이전 영화들은 사물을 멋있고 품위 있게 보이도록 꾸밈성에 비중을 두었는데 이제 이 같은 허구보다는 사실을, 고상하나 영웅보다는 평범한 사람을, 예외적인 것보다는 일상에서 쉽게 대할 수 있는 현실을, 그리고 타락하고 희망 없는 사회구조가 인간의 가치를 어떻게 파괴하고 위협하는가를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네오리얼리즘의 특징이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영화사조인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은 연기 경험이 없는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하는데 관용적이었다. 또 스튜디오 등 안정된 촬영보다는 길거리 등 야외 촬영 장면을 선호해 관객들에게 사실적인 공감을 얻어내는데 주력했다. 아울러 사운드도 의도적으로 만든 인공적인 것은 가능한 배제하고 실제 소리를 강조하는 편이었다. 때로는 뉴스의 필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큐멘터리적 요소도 적극 활용했다.      

<자전거 도둑>이 바로 이런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전형적 특성을 따르고 있다. 로케이션 촬영이 그렇고 현실적 화면 구성과 카메라 이동도 전형적이다. 특히 비전문 배우의 등장이 돋보인다. <자전거 도둑>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이는 실제 로마의 금속 노동자였고 어머니 역 역시 배우가 아닌 신문기자가 대신했다. 뿐만 아니라 리얼한 연기로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아들 부르노 역을 맡은 이는 실제 로마의 신문배달 소년이었다. 이와 관련 미국의 한 제작자가 당시 스타였던 캐리 그란트를 안토니오역에 캐스팅을 조건으로 투자제안을 한 것을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이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렇게 철저한 리얼리즘 정신에 입각해 탄생한 영화 <자전거 도둑>은 영화사의 한 시기를 가르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에서 유행했던 선형적 연결성을 추구했던 운동-이미지 중심의 영화와는 또 다른 영화의 탄생을 예고한 새로운 영화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새 영화 탄생의 예고시간-이미지의 시대의 서막     

2차 대전 직후, 당시 할리우드 중심의 세계 주류 영화들은 대개 선형적 연결성을 특징으로 하는 운동-이미지 중심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흐름에 균열을 낸 것이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영화 탄생 이래 운동-이미지와 더불어 공존해 왔던 시간-이미지의 역할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도록, 아니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다. 들뢰즈는 시간-이미지라는 개념이 온전하게 주어진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운동-이미지와의 대립관계 속에서 ‘부정적인’ 방식으로 정의되고 구체적인 영화 텍스트들 속에서 경험적으로 재발견되는 개념이라고 했다. 이런 측면에서 <자전거 도둑>을 비롯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은 시간-이미지의 부정적이고도 경험적인 재구성을 가능하게 한 특정 조건들을 확연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부정적인 조건인 ‘분산적인 상황’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탄생 배경이면서 기본전제기도 하다. 

운동-이미지 중심의 고전영화는 주체가 중심이 되어 운동의 진행방향과 방식을 통제하는 영화다. 그러나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상황에서 특히 유럽, 그것도 패전국 이탈리아의 상황은 이러한 주체적 움직임을 이끌고 통제할 주체가 상실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댄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영화에서 이야기 전개는 상황-행동-상황, 혹은 행동-상황-행동으로 이어지는 주체의 행동과 상황의 인과적 구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잘 짜인 구조는 파괴되고 상황은 산만하고 분산적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미지 태동을 위한 두 번째 조건인 ‘의도적으로 약한 고리’와 ‘여행의 형식’이다. 

실제로 <자전거 도둑>에서도 영화 속 인물들은 영화적 배경과 밀착돼 있지 못하다. “실업이 내 탓이냐!”라고 항변하는 직업소개소 관계자, “도둑은 직접 알아서 찾으라”라고 윽박지르는 경찰관, “자전거를 지금 찾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며 지극히 애매모호한 말을 하는 점술사 등등 등장인물들은 도대체 영화의 이야기 흐름에 어떠한 기여를 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영화적 배경인 현실의 부조리함, 무의미함, 느슨함을 그저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 부자(안토니오와 부르노)는 자전거를 찾기 위한 방황으로 영화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한다. 방황, 방랑 등 이른바 시간-이미지 태동을 위한 세 번째 조건인 ‘여행의 형식’이다.      

그리고 결국 두 부자는 이런 힘든 방황의 시간을 견뎠지만 그토록 바랬던 자전거를 찾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그들에게 자전거는 단순한 운송수단 그 이상의 의미, 생존의 끈이었다. 그런 자전거를 찾을 수 없게 된 그들은 변하지 않을 그런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진부한 세상을 인식하고 그 속에 떠도는 자신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즉, 시간-이미지 태동을 위한 네 번째 조건인 ‘상투성에 대한 자각’이다. 그리고 종래는 세상의 이런 상투성 속에서 그 자신이 자전거 도둑이 되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을 그렇게 만든 세상의 플롯에 비난을 퍼붓도록 한다.      

이 영화 <자전거 도둑>은 이런 이야기 흐름 속에서도 당시 무능력, 무의미의 극치를 보여준 사회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숨기지 않는다. 예컨대 실업자의 상황을 관성적으로 대하는 관리, 형식적으로 신고만 받는 경찰, 오히려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도둑잡기를 포기할 것을 주장하는 또 다른 경찰, 거기에 교회와 미신적 주술까지 그 기능과 권위에 문제제기를 한다. 뿐만 아니라 도둑을 옹호하는 같은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몰염치한 대중의 모습도 조롱하고 있는 느낌이다. 바로 이런 점이 날카로운 비판정신으로 어두운 시대를 비췄던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가치를 빛나게 하는 대목일 것이다.            

                

이렇게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통해 시간-이미지 중심의 영화들은 세상에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영화의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영화의 도래를 재촉한 예고편으로서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또한 그 역할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수많은 사회비판 영화, 리얼리즘 영화의 전범, 교과서로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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