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우리 종목이!"
낡디 낡은 주공아파트의 좁은 계단을 올라
먼지 쌓인 초인종 스위치를 누르면,
어김없이 들리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낡은 천에서 느껴지는 퀘퀘한 향이 살짝 밴,
까실까실한 촉감을 만끽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품에 가득 안으시던 할머니.
누가 봐도 느껴지는 애정이 달랐기에
누나들의 시샘 어린 눈길에 나는 늘 우쭐했지만,
자라며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 사랑은 아버지를 향한 크나큰 사랑의
고작 작은 파편에 불과했단 것을.
하지만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던 것은
그 자투리 사랑마저 너무도 따뜻하고 커다래서,
새로 지은 솜이불에 폭 파묻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돌박이 아들을 걱정하는 어린 새댁처럼,
팔순이 넘은 할머니는 늘 내게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셨다.
아버지가 해외 여행이라도 갈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셨다.
"네 아빠 잘 있대냐? 그 나라엔 별일 없다냐?"
그뿐이랴.
뉴스에서 나오는 사고 소식에
아버지 걱정을 그렇게나 하셨다.
청년실업이 증가한다는 말에
정작 해당되는 나보다
아버지 걱정을 하셨을 정도였다.
표현이 썩 다정하고 따뜻했던 분은 아니셨지만,
불편한 몸으로 끊임없이 내어 오시는 음식들을
와구와구 먹는 내 모습에 주름 가득한 눈웃음 보이실 때면
그냥 그게 다정함이고 따뜻함이었다.
겨울날 비좁은 거실에 들어서면 늘 미리 깔아 두신 이불이 있었다.
후다닥 누워 낡은 티비에서 나오는 옛날 노래를 들으면,
따뜻한 장판의 온기가 몸에 스며들었다.
점 당 10원짜리 고스톱을 함께 치며 저녁시간을 보내고 나면,
늘 사진을 꺼내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다 더 그리워하는 사람,
바로 먼저 간 큰며느리, 우리 엄마 사진이었다.
자신의 칠순 사진에서 고운 한복을 입고,
한복보다 더 곱게 미소를 짓고 있는 며느리를 보시며 늘 우셨다.
이렇게 착하고 예쁜 사람이 없었다며,
늘 "어머니어머니! 있잖아요!"라고 쪼르르 와서 이야기했다며
실감 나게 재연을 하는 연기파 할머니의 손주 맞춤형 레퍼토리였다.
할머니댁 앞 슈퍼마켓에서 사탕세트를 잔뜩 사서 드리면,
기어이 조그만 봉지사탕 한 봉지로 바꾸고야 마는
고집쟁이에 구두쇠 할머니였다.
아버지가 주시는 용돈을 모아
내가 대학을 갔을 때 100만 원을 주셨던,
증손자가 생겼다고 전화하는 내게
또 100만 원을 보내신 통 큰 할머니셨다.
자신을 쏙 빼닮은 증손주를 만나지 못하고 먼저 떠나셨지만,
왕할머니의 축복 덕인지 조산기가 심했던 증손주 녀석은
문제없이 개월을 채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아직도 아들을 보면 할머니가 떠올라
혼자 씨익 웃게 된다.
목청도, 웃음도 참 많이도 닮았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손을 잡고 나는 자랐다.
어머니의 빈자리, 온기를 채워 준 그 주름 섞인 손의 따스함 덕에
몸서리 칠 정도로 아린 삶의 겨울을 버텨낼 수 있었다.
지금도 낡은 계단을 올라 만만치 않게 낡아빠진 벨을 누르면,
어김없이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퀘퀘하고 까슬한 옷으로 내 뺨을 휘감아 주실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