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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목 Oct 16. 2024

나의 쉼터를 그리며

"아이고 우리 종목이!"
낡디 낡은 주공아파트의 좁은 계단을 올라
먼지 쌓인 초인종 스위치를 누르면,
어김없이 들리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낡은 천에서 느껴지는 퀘퀘한 향이 살짝 밴,
까실까실한 촉감을 만끽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품에 가득 안으시던 할머니.

누가 봐도 느껴지는 애정이 달랐기에
누나들의 시샘 어린 눈길에 나는 늘 우쭐했지만,
자라며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 사랑은 아버지를 향한 크나큰 사랑의
고작 작은 파편에 불과했단 것을.

하지만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던 것은
그 자투리 사랑마저 너무도 따뜻하고 커다래서,
새로 지은 솜이불에 폭 파묻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돌박이 아들을 걱정하는 어린 새댁처럼,
팔순이 넘은 할머니는 늘 내게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셨다.

아버지가 해외 여행이라도 갈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셨다.
"네 아빠 잘 있대냐? 그 나라엔 별일 없다냐?"

그뿐이랴.
뉴스에서 나오는 사고 소식에
아버지 걱정을 그렇게나 하셨다.

청년실업이 증가한다는 말에
정작 해당되는 나보다
아버지 걱정을 하셨을 정도였다.


표현이 썩 다정하고 따뜻했던 분은 아니셨지만,
불편한 몸으로 끊임없이 내어 오시는 음식들을

와구와구 먹는 내 모습에 주름 가득한 눈웃음 보이실 때면


그냥 그게 다정함이고 따뜻함이었다.


겨울날 비좁은 거실에 들어서면 늘 미리 깔아 두신 이불이 있었다.
후다닥 누워 낡은 티비에서 나오는 옛날 노래를 들으면,
따뜻한 장판의 온기가 몸에 스며들었다.

점 당 10원짜리 고스톱을 함께 치며 저녁시간을 보내고 나면,
늘 사진을 꺼내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다 더 그리워하는 사람,
바로 먼저 간 큰며느리, 우리 엄마 사진이었다.

자신의 칠순 사진에서 고운 한복을 입고,
한복보다 더 곱게 미소를 짓고 있는 며느리를 보시며 늘 우셨다.

이렇게 착하고 예쁜 사람이 없었다며,
늘 "어머니어머니! 있잖아요!"라고 쪼르르 와서 이야기했다며
실감 나게 재연을 하는 연기파 할머니의 손주 맞춤형 레퍼토리였다.

할머니댁 앞 슈퍼마켓에서 사탕세트를 잔뜩 사서 드리면,
기어이 조그만 봉지사탕 한 봉지로 바꾸고야 마는
고집쟁이에 구두쇠 할머니였다.

아버지가 주시는 용돈을 모아
내가 대학을 갔을 때 100만 원을 주셨던,
증손자가 생겼다고 전화하는 내게
또 100만 원을 보내신 통 큰 할머니셨다.

자신을 쏙 빼닮은 증손주를 만나지 못하고 먼저 떠나셨지만,
왕할머니의 축복 덕인지 조산기가 심했던 증손주 녀석은
문제없이 개월을 채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아직도 아들을 보면 할머니가 떠올라
혼자 씨익 웃게 된다.
목청도, 웃음도 참 많이도 닮았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손을 잡고 나는 자랐다.
어머니의 빈자리, 온기를 채워 준 그 주름 섞인 손의 따스함 덕에
몸서리 칠 정도로 아린 삶의 겨울을 버텨낼 수 있었다.

지금도 낡은 계단을 올라 만만치 않게 낡아빠진 벨을 누르면,
어김없이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퀘퀘하고 까슬한 옷으로 내 뺨을 휘감아 주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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