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만 있는 기분 좋은 게으름
유럽 14년 차가 되어서야 드디어 마드리드에 다녀왔다. 쨍쨍한 가을의 해를 등지고 스페인골목 타파스를 찾아서 기웃거린 게 분명 엊그제 같은데 베를린엔 이미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올해 늦가을의 기억은 운 좋게도 화창한 날씨의 마드리드에 남았다.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3시간만 비행했는데 전혀 다른 일상과 분위기가 있다. 이른 오후 낮잠 시간을 위해 문을 닫은 상점들과 조용한 거리, 해가 저물수록 모여드는 사람들과 밤늦게까지 가득 찬 수많은 레스토랑들. 파리보다 조금 더 느리게 걷고 꾸밈이 없는 스페인 수도의 첫인상은 꽤 오래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산안톤 시장에서 만난 커피에 진심이셨던 바리스타 할아버지, 한적한 동네 플리마켓에서 만난 멋쟁이 아주머니, 식당 앞에서 유쾌한 농담을 던지던 찐 스페인 아저씨까지. 셋째 날이 되어서야 조금이나마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일정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장소는 단연 프라도 미술관이었는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미술관에서 사진을 찍지 않고 온전히 작품만을 감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고야의 수많은 작품들이 만화처럼 하나의 스토리로 펼쳐졌다. 사진을 찍을 수 없어 마음에 드는 작품명을 머릿속으로 기억했다. 예전에는 기억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었지만, 찍을 것이 너무 많은 요즘엔 사진 한 장 남지 않는 경험이 더 오랜 시간 상징적으로 각인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공유와 전달을 위함이 아닌, 오롯이 나의 몸과 머리가 그 순간의 감정을 느끼는 법은 지금 시대에 특히 쉽지 않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모든 게 순탄했지만 그대로 행복했던 여행. 여유가 필요할 때면 한 번씩 꺼내보는 기억으로 남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