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작가’ <강> 서정인 작가와의 만남 2
“그랬겄죠.”
서정인 작가에게 대표작 <강>, <후송>, <달궁> 등이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소설인지 묻자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로 대답한다. 작품 속의 인물과 구성에 대해 더 물어보려는 순간, 그는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준다.
“누군가 제 글에 대해 물으면 이렇게 말해요. ‘내 글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읽어 봐라.’”
참으로 당당하고 멋진 말이다. 작가는 글로써 모든 것을 말한다는 그의 철학이 잘 담겨있다. 서정인 작가의 소설은 읽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더니, 그 물음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예전에 친구들이 그의 소설을 읽으면 반응이 두 가지였다고 한다. 첫 번째는 ‘글 재밌구나. 네 것을 읽으면 딴 건 싱거워서 못 읽어.’ 두 번째는 ‘네 글은 어렵고 재미가 없어.’ 그는 소설이 어렵다는 친구에게 “니가 소설에 대한 생각을 바꿔라. 셰익스피어를 어떻게 한 번 읽고 이해하려고 하냐.”고 답했다. 문학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글과 같이 살아야 하고, 절대 한 번 보고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재밌고 쉬운 것은 예술이나 문학이 아니라 오락이죠. 요즘 어떤 책은 두 번 못 읽어요. 문학은 그 자체로 무거워야 해요. 문학은 단순히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짝 깨우고 긴장하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차곡하게 쌓인, 글쓰기에 대한 그의 신념이 잘 드러난다.
서정인 작가는 예전 이경수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소설 쓰기를 현장과 경험에 두는 주장에 저항을 느낀다’고 했다. 말하자면 경험한 것만 쓰되 경험대로만 쓰지는 않는 것이다. 첫 작품 <후송>은 1962년 여름방학 때 고향 순천에 내려가서 무더위와 다투며 썼다고 한다. 강원도 2사단과 20사단에서 근무하고 육군 중위로 전역한 그가 겪은 군대에 대한 기억이 잘 담겨있다.
<후송>은 군대 내부의 부조리함과 모순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우리 사회의 소통과 신뢰 부재의 문제를 날카롭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귓병을 앓고 있는 성중위를 통해 군대라는 집단 속에서 개인이 겪는 지독한 고독과 소외를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누가 보면 내 소설은 <강> 밖에 없다고 생각하겠어요.” 그는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많은 독자들에게 서정인의 대표작은 <강>으로 통한다. <강>은 동료 교사 두 명과 함께 김포 학부형 집에 놀러 간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을씨년스러운 도시 풍경과 인물들은 6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암울했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달궁가는 길>의 서두에 이종민 작가가 그랬고, 서정인 작가 스스로가 말했듯, 어떤 것도 서정인 소설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의 문학을 이해하고 맛보기 위해서는 소설과 글을 접하는 것이 가장 직접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순천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제법 잘 해서 아버지는 법대를 가라고 했지만 그의 선택은 영어영문학과였다. 지금 스무 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영어 대신에 중국어나 다른 언어를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대학생 서정인은 공부는 바닥이지만 이상은 높아서 성적은 항상 B학점을 넘기지 못했다며 웃는다.
같은 수업을 듣는 여학생들이 B 학점을 받고 슬퍼할 때 그는 환호했다. 시, 소설, 문학 수업을 사랑했으며 잘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불어, 문학 수업은 챙겨 들었다. 술도 담배도 참 많이 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담배는 단번에 끊고, 술은 지금도 꽤 좋아한다. 먹고사는 생계의 문제로 소설만 쓸 수 없었던 그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보람을 느꼈지만 소설을 쓰는 일이 조금 더 성취가 있었다고 한다.
소설 <바간의 꿈>과 수필 <미얀마 기행>에서도 잘 드러나 듯 서정인의 미얀마 사랑은 대단하다. 언뜻 떠올리기에 덥고, 가난한 나라 미얀마가 그를 사로잡은 매력은 무엇일까.
“미얀마의 팬이요. 가난하고 무지하고 지저분해도 떳떳하죠. 그들은 우리를 안 부러워해요. 돈 많은 것을 안다. 하지만 부럽지 않다고 말해요. 가난해도 미얀마 사람들에겐 여유가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외로 이민 가려고 안달이죠. 미국이나 서양도 차갑긴 마찬가지잖아요.”
미얀마에는 다리가 많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두 시간 정도면 차로 갈 수 있는 200km를 여섯 시간 넘게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리를 만드는 대신 계곡을 따라서 자연 그대로 돌아간다. 미얀마 사람들이 선각자라서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태생이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이야기를 열을 내며 들려준다.
“이탈리아를 갔는데 가방과 호주머니에 누군가의 손이 들어와서 놀라 보면 헤헤 웃고 태연하게 가버려요. 칼만 들지 않았지 강도잖아요. 언젠가 동남아 여행 중에 카메라를 배낭에 넣고 자전거를 타고 한참 갔는데, 알고 보니 배낭을 버스 정류소에 놓고 왔어요. 당연히 누군가 가져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어요.”
<바간의 꿈>은 미얀마의 불교 성지 바간이 배경인 작품이다. 바간 여행 중 만난 40대 이탈리아 남자는 미얀마의 공기와 햇볕을 찬양한다. 그러면서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나라들이 서양 문명을 무분별하게 따라가는 세태에 안타까워한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행복감이 높은 이유를 여행자의 눈으로 잘 담아낸 작품이다.
서정인 작가는 차를 타고 오면서도 거리의 간판은 물론 글과 일상의 대화까지 모두 외래어가 됐다면 걱정했다. 그는 전통이 다른 우리 문화 속에 외국어가 무차별적으로 들어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외국어를 반드시 써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가급적 우리말을 쓰는 게 옳다는 것이다.
“대학생들도 국어가 엉터리예요. 영어는 선택이어도 좋은데 국어는 필수입니다. 우리나라는 방송에서 외국인이 어설픈 한국어를 하면 열광해요. 산골까지 티비가 있으니 방송 영향력이 커요. 전 방송에 불만이 많아요. 아, 불만이 많다는 것은 기대가 많다는 겁니다.”
그는 평생 본업이 작가고 부업이 교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업 작가를 해도 글이 잘 써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환하게 웃는다. 우리나라 문학은 음식을 씹어서 독자에게 주는데 그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줘야 한다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다며 이번에는 씁쓸하게 웃는다.
왕년에 뜨겁게 열정을 불태워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으며, 신이 내린 귀한 존재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보고 아프니까 병원에 간다고 했다는 그는 출판과 문화사업이 지나치게 상업주의와 자본주의로 가는 것을 경계했다.
소설을 쓰는 작가는 물론, 방송을 만드는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의미와 가치를 찾는 작업보다 유행과 자본을 쫓는 것이 우선일 경우가 많다. 그래야 시청률이 보장되고, 그것은 곧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도 시청률이 낮으면 광고가 붙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라는 푸념을 그에게 늘어놓았다.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작가들이에요. 글을 제대로 써야 해요. ‘니 책은 안 팔려, 아무도 안 읽는다’고 하면 할 말이 있습니다. 안 팔리고 안 읽는 것은 독자들의 선택이니까 어쩔 수 없어요. 요즘은 출판사에서 책을 사들이기도 하잖아요. 아주 위대한 작가는 그 시대의 취향까지 바꿔야죠. 읽게 만들어야 해요. 나는 거기까지 못했는데,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어렵다는 글쓰기는 타고나는 것일까, 아니면 노력의 결과물일까.
“아주 비옥한 밭도 갈고닦아야 하지 않겠어요. 음...그래도 타고나는 것이 있겠죠. 안 타고나면 본인이 괴롭죠. 요즘은 아이들이 뭘 잘 하는지 발견하는 게 중요해요. 싫어하는 거 억지로 시키면 원수 됩니다.”
서정인 작가의 나이는 올해 여든 하나. 유머러스하면서도 논리적인 말에 넋을 놓고 있다가도 가끔 나오는 단어 한마디는 그와 나의 세대 차이를 실감하게 했다. 나에게 몇 년 생인지 물어오기에 ‘순천고등학교 48년 후배’라고 했더니 감회가 새로운 듯 예전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일제시대, 광복, 6.25를 직접 겪었거든요. 전쟁 때 순천에도 인민군이 내려왔었는데 전투기에서 포탄이 벽돌처럼 떨어졌어요. 나보다 어린 북한군 소년병이 메이드 인 체코슬로바키아라고 적힌 따발총을 들고 다녔던 것도 기억납니다.”
서정인 작가가 직접 겪은 사건을 역사로 기억하는 나와 오래전 할머니에게 동학 농민 운동 이야기를 들었다는 자신이 비슷할 거라고 했다. 아마도 내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90년대 또한 누군가에겐 역사로 기억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나도 오래전 그들과 동 시간이고, 자네도 지금 나와 동 시간이야.” 인터뷰의 끝 무렵에 나온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먹먹함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내 몸뚱이는 순천의 흙으로 빚어졌고 그곳의 빛과 물과 바람으로 컸다’는 서정인 작가. 지금은 전주에 더 오랜 시간 있지만, 순천을 찾는 이들이 있으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를 가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했더니 집에 가는 길에 내가 구경하고 싶다던 전주 한옥마을에 내려주겠단다.
2013년, <현대 문학>은 서정인 작가가 전직 대통령들을 언급한 부분 중 특정 인물을 문제 삼으며 그의 글을 게재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현대 문학>은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고 있으며 그 권위가 땅을 쳤다. 다소 민감한 부분일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누군가는 전화로 항의를 하고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고 합니다. 난 그 소식을 듣고 그냥 <현대 문학> 사람들의 연락처를 지워버렸어요.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죠. 항상 지나친 비난과 확대 해석을 경계합니다. 우리에겐 선택이라는 힘이 있어요. 미디어가 엉망이면 TV를 끄면 되고, 정치가 엉망이면 표를 주지 않으면 되거든요.”
그리고 잡지사에서 일한다는 아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막내아들, 막내아들 해서 모르고 있었다가 그의 철없다는 아들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다가 그 잡지사의 번듯한 편집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도 아버지에게 아들은 언제나 큰 걱정거리면서 동시에 자랑이 아닐까.
전주를 떠나 서울로 가는 기차가 출발한다. 서정인 작가와 나눴던 말과 생각들을 막상 글로 옮기려니 덜컥 겁이 났다.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서정인 작가에게 누가 될까 걱정이었고, 그의 문학을 좀 더 쉽게 많은 이들에게 알리겠다는 애초의 기획의도가 잘 묻어날지 의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도 잠시, 금방 서울에 도착해 용산에서 노량진 가는 전철에 올랐다. 노량진에서 집으로 가는 9호선 급행열차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별일이 없는데도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환승역으로 달리고 또 달려서 겨우 열차에 몸을 우겨넣는다. 발 디딜 틈은커녕 손 둘 곳도 없어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밀려다닌다. 노량진에서 내가 사는 전철역까지 급행과 일반 열차의 차이, 6분이다.
* [순천, 그리고 순천사람들 4] ‘조정래의 길을 따라 둘러보는 순천 풍경’ <태백산맥> 조정래 작가의 문학 속에 나타난 순천사람들과 순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길을 따라 순천 풍경을 둘러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