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상찬(餐) 금지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식사를 했다. 한시간 반 동안 핸드폰에게 아주 꿀같은 휴식 시간을 줬지. 대기업 생활 30년이 참 힘들었다며 자기 딸은 대기업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선배와 자기 아빠는 아직도 자신이 도전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하소연 하는 후배의 점심식사.
H : 대기업에는 안 갔으면 좋겠어.
A : 대기업도, 스타트업도 다 장단점이 있잖아요~ 그리고 요새는 1-2년 만에 다른 회사로 옮기는 친구들도 많아요.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가는 경우도, 스타트업에서 대기업으로 가는 경우도 있어요. 따님 분이 뭘 하고 싶은 지가 중요할 거 같아요. 물론 가서 마음이 바뀔 수도 있죠. 엄청 높은 비율로.
H : 그런데 우리 아이는 뭐 하고 싶은 지 잘 모르겠어
A : 아빠들은 원래 그런가요. ㅋㅋ 저희 아빠도 그런 걱정 하시는 게 보였는데. 아빠의 눈에는 저희가 어리게만 느껴지나봐요. 그리고 저희도 아직까지 모르잖아요, 뭐 하고 싶은 지. 그 때도 그랬고 :)
H : 내가 딸아이를 잘 키웠나 이런 생각 들 때가 있어. 너무 공주님처럼 키웠나 그런 생각 있잖아.
A : 꼭 힘든 장애물이 있어야 하나요! 요즘 친구들은 대부분 걱정 없이 자랐잖아요~ (물론 저마다 고민이 있었겠지만, 나처럼) 그래서 더 세상을 즐기고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도 있죠. 나 외에 다른 사람도 더 챙기고요. 그러면 더 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어쨌든 제 선택에 어떤 의견도 주시지 않고 묵묵히 옆에 서 계셨던 부모님이 큰 힘이 되었던 건 확실해요. 만약 저에게 뭔가를 기대하시고 요구하셨다면, 저는 실망시키지 않으려 하다보니 도전하지 못했을 거에요.
A : 전 요즘 한국으로 돌아가는 고민도 하고 있어요. 처음에 여기 넘어온 건, 한국 사람들 중에 경쟁력을 가지고 싶어서였어요. 중국에 대해 아직도 편협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많잖아요. 좋은 거든, 나쁜 거든 여기 와서 제대로 이해하면 좋겠더라구요. 그런데 나와보니 웬걸, 더 막막해요. 중국에 있는 한국인이랑 경쟁하는 게 아니라, 중국인들과 경쟁해야 하니까요. 언어 장벽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도 적극적으로 못하는 것 같고. 이미 슬픈 경험도 제 나이 삼십, 너무 이른 시기에 했고.
H : 아니야. 그래도 여기 좀 더 있어봐. 여기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거니까.
H : 지금의 대기업이 언제까지 대기업일 것 같아?
(문득 최근에 뵈었던 다른 선배님 말씀이 떠올랐다. 삼성과 CJ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요지는 몇 십 년 전 제일제당에서 파생된 삼성이 지금은 기업 가치가 훨씬 더 높고 영향력이 있다는 것.)
A : 그러게요. 아마도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대기업은 언젠가 위기를 맞겠죠. 제 첫 번째 회사는 오프라인으로 대부분의 매출이 나는 산업군이었는데, 나름 1등 회사라고 온라인 사업을 일찍이 준비했어요. 그래서 여전히 경쟁력이 있죠. 플랫폼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저도 그 물살에 몸을 맡겨 이렇게 중국까지 ~ 그런데, 높으신 분들께서 그 전략을 중국에 그대로 적용했어요. 될 거라 자신했지만 크게 데였어요.
H : 맞아. 운수 산업도 그래. 자동차, 기차, 비행기. 지금까지는 거리나 물량에 따라 세 가지의 효율이 명확하게 나뉘었어. 그런데 봐봐. 고속철이 생기고, 저가 항공사가 생기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어. 심지어 지상에 튜브가 개발되고 있대. 진공 튜브. 이론적으로는 마찰이 없어서 멈추지 않는 거지. 그래서 멈추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더라고. 그럼 과연 누가 승자가 될까? 지금의 승자가 미래에도 승자일까?
A : 그러네요. 저는 운수 산업의 미래 주요 경쟁자가
‘알리바바’나 ‘아마존’이 될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비행기요. 지금까지 항공산업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항상 갑이라고 여겼죠. 그런데 운송 수단이 다양해지고, 앞으로는 엄청난 유통 물량을 보유한 플랫폼 업체가 운송 수단을 선택하게 되겠죠. 특히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운송 수단 간에 효율 차이가 줄어들면 더더욱요. 요즘처럼 코로나로 사람 간의 이동이 줄어들었을 때는
더 그렇겠죠.
H:그럴 수도 있지.
A :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경쟁일 수도 있구요. 이미 자율주행 시장에선, 자동차 그 자체보다 자동차를 제어하는 소프트웨어가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잖아요. 화장품 회사도 그래요. 큰 회사들은 대리점에서 나오는 매출이 있으니, 온라인에 집중 투자를 못해요. 제가 다니던 중국 회사도 그래요.
H : 우리나라 기업들 잘 할 수 있을까? 끊임 없이 변화 해야지만 하는데, 막상 위로 올라가면 자리를 지키느라 그게 힘들어.
A : 이해해요. 어떤 부분에선. 정말 힘들겠죠.
한시간 반이 훌쩍 지났다. 돌아가는 길에 선배님께서 최근에 읽은 <총.균.쇠>를 추천해주셨다.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집에 돌아와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를 틀었다. 평소에 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눌러봤는지. 마침 게스트가 공현주였는데, 예전에 <총.균.쇠>의 작가 분인 제레미 다이아몬드 편이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바로 그 편을 켰지. 작년 11월 27일 방송.
‘디테일’을 좋아해서 책을 쓰다보면 두꺼워진다고 허허 웃던 제레미 다이아몬드. 문명의 발전 과정, 그 안에서 승자는 왜 승자가 되었는지 여러 예시를 들어가며 정말 재밌게 설명해주셨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위기라고 생각했던 게 기회가 되고, 힘이라 생각했던 게 독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농경을 처음 시작한 서남아시아가 아닌, 가장 큰 배로 이미 여러 지역을 항해한 중국이 아닌, 유럽이 어떻게 세상을 제패할 수 있었을까. 한 번도 통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제가 오고가는 경쟁 속에서 제3세계를 탐험할 기회가 왔다고 했다. 또, 천연자원이 가득한 아프리카가 여전히 가난한 건, 자원 하나만 믿고 성장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너무 결과에 껴맞춘 해석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다. 역사가 그러했듯이, 기업도, 나 자신도 끊임없이 안주하지 않고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당부했듯이, 2050년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렸다. 과거와 현재를 통해, 내가 어떤 사고와 행동을 해야할 지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특히, 환경과 불평등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기로.
그런데 왜 딸과 아빠의 대화는
이렇지 못한 걸까?
* 아, 참고로 근친상찬(餐)은 선배님들의 귀여운 아재개그 같은 거였는데, 회사 점심시간에 가끔은 팀사람들이 아닌 외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라는 의미. 눈을 열고, 귀를 열고, 입을 열고~ 마음도 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