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나이 지긋한 의사분이 안경 너머 힐끗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제 배랑 허리랑 옆구리가 갑자기 아파서 진통 주사를 맞았는데요. 오늘도 다리를 움직이니까 그 자리가 계속 욱신거려서요."
"소변볼 때 아프다거나 혈뇨를 보거나 한 적은 없고요?"
"네... 그런 적은 없어요."
"음... 정확히 어디가 아픈 거예요?"
어제 주사 맞은 진통제 기운이 남아있어서인지 통증의 위치도 정도도 모호했다. 최대한 감각과 기억에 집중해서 떠듬떠듬 아픈 부위를 가리키자 그가 말했다.
"흐음... 거기엔 장기가 없는데?"
내과에서 '없는 장기가 아프다'는 진단을 받기 하루 전으로 돌아가 보겠다. 그날은 나에게 화요일이라 쓰고 헬요일이라 읽는 날이었다. 쉴틈 없는 일주일 루틴 중에서도 업무가 가장 긴박하고 막대한 날이기 때문이다. 아침 8시 정도에 책상 앞에 앉으면 시간에 쫓기느라 엉덩이 뗄 새 없이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고 꼬박 밤이 되어야 일을 털 수 있었다. 매주 헬요일을 앞두고 전날부터 잠을 잘 못 이루기도 했다.
자동으로 일찍 눈이 떠져 편집본 영상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아침, 난생처음 느껴보는 묘한 불쾌감이 일었다. 속이 울렁울렁해지고 머리가 아프더니 왼쪽 배와 옆구리, 허리 쪽이 빠른 속도로 기분 나쁘게 욱신거려왔다.
날짜를 확인하고 이른 생리통인가, 싶어서 얼른 진통제 한 알을 털어 넣었다. 팀 모두가 막중한 업무량을 불꽃 스피드로 마쳐야 하는 날인 데다가 나는 작가팀 업무의 최종 수정 작업까지 해야 했다. 내가 삐끗하면 다른 작가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가중될 것이고, 이후 후반 작업들도 도미노처럼 연달아 덜컥거릴 것이었다.
'아오... 왜 이래... 오늘은 아프면 안 되는 날인데'
진통제가 잠깐 듣는가 싶더니 다시 통증과 메슥거림이 시작됐다. 자꾸 이렇게 신경 쓰여서야 오늘 업무량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병원 진료 시작 시간까지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바빠서 부랴부랴 가까운 응급실로 향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세요?"
"배랑... 옆구리랑 허리가 다 아파요. 속도 울렁거리고요. 머리도 아프고... 주기 확인해보니까 4일 정도 남았던데 생리통인가 싶기도 하고요."
빨리 처방을 받고 통증을 끝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나는 내 마음대로 진단을 내렸다. 내 얘기를 들은 의사도 다른 소견 없이 진통제 주사를 맞고 가라고 했다. 주사를 맞고 정신없이 집에 돌아오는 길, 밤을 새우며 작업한 PD의 편집본이 도착해있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날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붙인 그대로 깜깜하게 날이 저물어서야 일을 마쳤다.
다음날, 샤워를 마치고 바지를 입으려 왼쪽 다리를 올리는데 어제 아팠던 왼쪽 배가 묵직하게 아려왔다. 아무리 둔한 나라도 평소의 생리통 하고는 다르게 뭔가 께름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어제보다는 짬을 낼 수 있는 날이라 팀에 양해를 구하고 부랴부랴 내과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그 부위에 장기가 없다니... 아니 의사 양반 이게 무슨 소리요...! 장기가 없다니!!!
꾀병으로 의심받는가 싶어 열심히 어제의 통증을 호소하는 나에게 의사는 산부인과에 가볼 것을 권유했다.
'현대 의학의 수준으로 아직 밝혀내지 못하는 생소한 병이면 어떡해...' 같은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근처 산부인과를 부랴부랴 검색해 다시 진료를 받았다. 내 몸을 내가 잘 모르니 아픈데 발품 팔으랴, 돈 쓰랴 고충이 두 배다.
내과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린 후 자궁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역시 정상적인 상태였다. 다만 어제의 진통 주사 기운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는지 왼쪽 복부가 다시 쥐어짜는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가 고통스러워하자 산부인과 의사는 초음파로 복부 전체를 살펴봐주었다. 딸깍, 딸깍 소리와 함께 내 뱃속의 장면들을 몇 번 촬영하더니 말했다.
"지금 왼쪽 신장이 오른쪽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부어있거든요? 아마 결석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이 건물 9층에 비뇨기과가 있어요. 초음파 사진이랑 진료의뢰서 챙겨드릴 테니까 가지고 얼른 가보세요."
이날 이때 껏 큰 탈 없이 건강한 편이었던 나는 몸속에 돌 같은 게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비뇨기과에 도착할 때쯤에는 여느 결석 환자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구부리고 잔뜩 찡그린 채(*나중에 알아보니 대부분의 결석 환자들은 떼굴떼굴 구르거나 허리도 제대로 못 편 채로 병원에 들어서는 게 대부분이라고 한다.) 들어갔다. CT 촬영 결과 신장 입구를 제법 큰 결석이 막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게다가 어제 하루 진통 주사를 맞고 버틴 탓에 수분을 배출하지 못하던 왼쪽 신장에 물이 찰대로 차있는 상황이었다. 비뇨기과에서는 그날 바로 결석을 깨는 시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거대한 기계가 있는 방에 홀로 누워 기계 틈에 배를 끼워 넣고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내과에서 거기엔 장기가 없다고 한 건
지금 생각해도 대박 웃기네 큭큭'
'내 몸에도 돌이 생기는구나...
남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앞으로 하루에 물을 2리터씩 마시라고?
와... 어떻게 다 마시지? 피부는 좀 좋아지려나?'
그러다 퍽 소리와 함께 기계가 내 몸속 돌멩이를 향해 무언가를 쏘는 느낌이 났고, 서너 번 반복될 때쯤부터 나는 별안간 엉엉 울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서였는지, 내 몸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신장이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참고 일했다는 게 서러워서였는지, 단순히 아픈 데를 자꾸 치니까 더 아파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병원에서도 이 시술이 좀 아프긴 할 텐데 이 정도로 오열하는 환자는 처음이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짧았던 우프 여행이라 아주 잠깐 들여다본 농촌 생활이지만, 이전까지의 내 삶과 달리 농촌에서 목격한 삶들은 하루를 자신이 좌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물론 농사일도 계절에 따라 떠밀리듯 바쁘게 일해야 하는 시기가 정해져 있고, 기를 써서 해낸 일이 자연의 힘 앞에 수포로 돌아가는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우퍼로 지내던 시기의 농촌에서는 볕이 뜨거운 날이면 새벽 일찍 일을 시작하는 대신 달콤한 낮잠을 충분히 자둔 뒤 햇볕이 한 김 식으면 다시 일을 나섰다. 날이 슬슬 서늘해지는 시기가 오면 지면이 조금 데워질 때 즈음 새참을 싸들고 일터로 향했다. 떠나오기 직전의 경험 때문인지 일과 몸을 모두 돌볼 수 있는 방법으로 이리저리 하루하루를 일구어갈 수 있음이 무척 부럽게 느껴졌다.
하루를 스스로 좌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도시에서 일하던 나에게는 없었다. 퇴근을 해도 촬영 아이템이 정해질 때까지는 밤이든 아침이든 계속 머리를 쥐어짜며 기사들을 뒤적거렸고, 주말에도 업무 관련 연락이 오거나 돌발 상황이 생기면 온통 신경이 쏠렸다. 내 주중 근무 시간이 도대체 40시간인지 80시간인지 세어볼 겨를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방송날을 중심으로 성실한 부품처럼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나는 몸의 통증조차도 나중에 짬을 내어 앓을 수 있다는 큰 착각을 했던 것일까. 비뇨기과에서 커다란 기계에 몸을 끼운 채 펑펑 울었던 나는, 하루하루를 내가 좌우할 수 없고, 내 가장 큰 자산인 건강을 돌볼 틈마저 선뜻 내지 못했다는 게 허탈하고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그 하루들이 모이고 모여 이뤄질 내 인생 전체도 이런 방식으로 다루게 될까 봐.
상황이나 처지, 사고방식에 따라 농촌에서도 얼마든지 더 촉박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도시에서의 삶은 나쁘고 농촌에서의 삶은 좋다는 이분법적인 생각은 아니다. 다만 도시에서 끊임없는 쳇바퀴 같은 리듬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던 나는, 덜컥 일을 쉰다는 큰 결정을 하고서야, 각종 시끄러운 뉴스들과 눈부신 모니터와 전자기기를 벗어나 고요하고 생경한 풍경 앞에 놓인 뒤에서야 겨우 인정한 것이었다. 내 삶의 방식,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의 삶을 이런 식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무언가 너무 잘못되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