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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oming Dec 28. 2020

순대볶음에 순대가 없어도

"아이고~ 오늘 콩하고 멸치 볶고 찌개 끓이고

하루 종일 불 앞에 서 있었더니 온 몸이 다 쑤시네"


엄마의 무용담은 늘 한숨 섞인 '아이고'와 함께 시작한다.


우리 집에는 전업주부의 요리 도구라 하기에는 좀 크기가 과해 보이는 냄비와 프라이팬들이 늘 있었다. 식구가 다섯이다 보니 밥솥의 밥과 반찬만 해도 무서운 속도로 쑥쑥 줄어드는 데다가, 아빠가 운영하는 서점의 직원들 몫까지 챙겼기 때문이다. 너무 힘드니까 그렇게까지 하지 말라는 만류에 엄마는 '매 끼니 사먹으면 남는 돈도 없고(중요), 건강에도 좋지 않을 것'이라는 지론으로 맞서며 분홍색 보자기로 곱게 싼 냄비나 큼직한 반찬통을 아빠 손에 들려 보냈다.



그러려면 2~3일이 멀다 하고 시장에서 장을 보고 억척스럽게 덤까지 얻어온 뒤, 가마솥만 한 냄비 앞에서 팔을 휘적휘적하는 일이 허다해야 했다. 엄마가 먹여야 할 사람들의 매 끼니를 감당하려면 커다란 솥과 프라이팬은 과한 게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요리 한번 마치면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분량을, 엄마는 지금까지도 정기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요리는 힘든 노동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혀 왔던 것 같다. 불 앞에 몇 시간씩 서서 요리를 하고 나면 가스 냄새와 기름 냄새 때문에 엄마는 종종 심한 두통을 앓았다. 계속 간을 보느라 입맛이 없다며 다 같이 앉은 식탁에서 몇 술 뜨지 못하는 일도 잦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무의식적으로 피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요리를 피해오며 살아왔던 것 같다. 엄마 역시 같이 사는 동안에는 밥솥으로 맨 쌀밥 짓는 것조차 나에게 시킨 적이 없다. '닥치면 어떻게든 하게 되어있으니 그때 가서 하든지 해라'라는 게 엄마의 두 번째 지론이었다.


그런데 독립과 함께 작년부터 요리를 시작한 나는, 요즘 일상의 많은 부분을 요리하는 시간에 기대고 있다. 시무룩한 하루 중에도 열심히 요리에 집중하는 순간만큼은 기분이 산뜻해지기까지 한다.


된장찌개와 고추장찌개, 마라 소스와 두반장 소스로 헐겁게 점철된 돌려막기에서 벗어나 조금 더 내 요리의 세계를 확장시켜보는 중이다.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다는 게 요즘은 그렇게 좋지만도 않다. '이 시간을 알차게 써야 하는데...' '지나고 나면 후회할 텐데...' 같은 압박감을 앓느라 뭐부터 해야 하나 헤매다가 땅을 치는 루틴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조짐이 보이는 날엔 왠지 조금 더 손이 갈 법한(전 적으로 내 기준...) 메뉴 속으로 도망친다. 매콤 짭짤하기까지하다면 울적한 기분을 날려보내기에 더할나위 없다. 오늘 메뉴는 순대 없는 순대볶음, 일명 '순없순볶'이다.

(채식하는 분들을 위한 레시피이지만, 순대 구하기가 어렵거나 귀찮은 분들에게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순대 없는 순대 볶음, 순없순볶>

(레시피 원 출처는 트위터 #밍구루망)

https://twitter.com/min_gourmand/status/1214540503804342273?s=20


재료 : 당면, 떡, 양배추, 양파, 파, 깻잎, 넣고 싶은 야채들(당근, 호박, 버섯 등), 참기름, 통깨


양념 : 고추장1T, 들깨가루3T, 고춧가루2T, 간장2T, 연두1T, 설탕1T, 다진마늘1T, 맛술1T, 후추 약간

1. 당면 한 줌을 끓는 물에 5~6분 데쳐 찬물에 씻어두고, 떡 한 주먹은 물에 불려둔다.

2. 분량의 양념을 섞어둔다.

3. 너무 가늘지 않게 채 썬 양배추 한 줌, 양파 반개를 기름 두른 팬에 반쯤 투명해지도록 볶는다. 그 외 당근 등 익히는 데 오래 걸리는 채소도 이때 투하.

4. 호박, 버섯 등 빨리 익는 재료를 추가로 넣어 볶는다.


5. (2)의 양념을 넣어주고, 너무 되직하면 물을 좀 추가한다. (건표고버섯 불려뒀다가 버섯은 볶고 불린 물은 이때 써주면 더 성공률이 높을 것이다. 건표고 불린 물 요즘 무한 신뢰 중)

6. 데친 당면과 떡을 넣어 섞어준다.

7. 취향대로 썬 파(나는 손가락 길이 정도 세로로 채 썰었다), 돌돌 말아서 채 썬 깻잎을 숨이 죽을 정도로만 볶는다. 이때 간을 보고 필요하면 더 맞춰줘도 좋다. 나는 고춧가루와 간장, 올리고당을 조금 더 넣었다. (야채를 너무 많이 넣어서...)

8. 불을 끄고 참기름, 후추 약간 섞어주고 토핑용 깻잎을 위에 올려 깨를 톡톡 뿌린다.



내가 요리한 메뉴의 대부분을 함께 나눠먹고 있는 혁도 요리를 잘하는 편이고, 해주는 때도 자주 있기 때문에 맛 평가에 있어서 굳이 입에 발린 말을 할 처지는 아니다. 그래서 간혹,

"좀 맛의 빈 곳이 느껴지는데?"

(눈치 보고)

"내일 먹으면... 진짜 맛있겠어..."

라는 식으로 수습이 필요한 코멘트를 하는 때도 있지만, 그래서일까 그의 입에서 "진짜 맛있다"라는 얘기가 나오면 나는 조금의 의심할 여지없이 마음껏 뿌듯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순없순볶은 매우 극찬을 받았다!



적어도 요리만큼은 하루 몇 시간이라는 빠른 기간 안에 결과물을 낼 수 있고, 신경을 쓰면 쓸수록 그럴법한 결과물이 나온다. 제 때 나는 재료들을 잘 이용해 메뉴선정을 하면 훨씬 경제적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져다주는 충족감 또한 크다.(엄마의 요리를 한 번도 돕지 못했지만 홀린 듯이 맛있게 먹었던 나날들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덜어본다.) 그렇다 보니 일도 줄고, 목표도 흐릿해져서 '요즘 내가 뭐하고 살고 있나' 하며 흘려보내던 나날 속에서 요리는 내가 내 효능감을 채울 수 있는 귀중한 수단이 되어주고 있다. 이렇게 좋은 점들이 엄연히 존재하기에 엄마도 그 힘듦을 멈추지 않았을거라 생각해본다.


'요리는 잘 몰라도 내 일에 푹 빠져서 멋있게 살겠지' 마냥 상상했던 서른 중반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나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먹고 싶은 메뉴를 대충은 해먹을 줄 알고, 나와 소중한 사람을 위해 시간을 들여 먹일 줄 아는 능력은 기대 이상으로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어주고 있다. 아직 요리라고 할만한 수준도 아니긴 하지만 조금 더 요리를 계속해보려 한다. 물론 2인분까지만을 기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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