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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문PD Jan 02. 2017

다시, 대성당들의 시대

박근혜, 최순실, 주갤러의 날들..그리고 트럼프의 미국

주갤러와 마티 배런의 평행 우주

2016년 12월 7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장.

박영선 의원은 DC인사이드 주식갤러리 유저들의 제보를 받아 ‘최순실을 모른다’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증언을 뒤집을 결정적인 영상을 국감장에서 공개했다. 12시간째 침착함을 잃지 않고 최순실과의 관계를 부정하던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증언을 번복했다.

들썩 달싹 콤보

12월 22일에도 주갤러의 결정적 제보가 있었다. 위증교사 의혹을 받고 있는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이 최순실 씨 변호인 이경재 변호사 등과 술자리를 함께 한 과거 사진을 찾아내, 박영선 의원을 통해 공개했다.


박영선 의원 트위터 화면 캡쳐


누군가는 이를 ‘새로운 직접민주주의의 첫 번째 사례’라 했고 어떤 이는 ‘국회 청문회도 시민이 주도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어떤 저널리스트나 국회의원도 밝혀내지 못한 진실을 일반 시민이, 검색을 통해 9년 전 자료를 발굴하고, 인터넷 게시판에서 공유한 후, 또 다른 시민이 이를 카카오톡으로 국회의원에게 전달했다. 기술이 가능케 한 풍경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 새로운 기술이 아주 결이 다른 풍경을 만들고 있다. 트럼프 당선이 확정된 후 3주가 지났을 무렵, 워싱턴포스트 편집장 마티 배런은 자신의 트위터에 비장한 칼럼을 링크했다.  

"Journalists in the age of Trump: Lose the smugness, keep the misison"

거칠게 번역하자면 "트럼프 시대를 살아갈 저널리스트들이여. 자만심은 버리고, 사명은 완수하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그 내용은 사뭇 냉소적이다.


‘사람들이 너(저널리스트)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라’

‘많은 사람들은 페이크 뉴스와 음모론과 검증된 사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울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얼굴에 철판 깔 줄도 알아야 한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전통적인 언론인들이나 언론사를 증오한다. 사랑 받으려 애쓸 필요 없다. 하던 대로 해라.' 등등...


쓸쓸하고 씁쓸한, 언론인들을 상대로 한 조언으로 가득한 이 칼럼을 왜 워싱턴 포스트 편집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내걸었을까.


트럼프와 페이크 뉴스

그가 맞이한 새로운 미국은,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객관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저널리즘의 의식적인 노력이 시골 동네 구석 차고에서 누군가 조작해 낸 페이크 뉴스에 압도당하는 불지옥이다.


페이크 뉴스. 즉, 가짜 뉴스는 미국 대선 기간 기승을 부렸다. 주로 민주당 진영을 깎아내리는 내용의 뉴스들로 상당수는 러시아에서 작성됐다고도 알려졌다. 가짜 뉴스 기사를 작성한 다음에 구글에서 검색되는 실제 기사에서 몇 가지 키워드를 뽑아 가짜 뉴스에 집어 넣은 다음 포토샵이나 가짜 뉴스 사이트를 만들어주는 웹페이지를 활용한 후 페이스북을 통해 유통한다. 가짜 뉴스가 진짜 뉴스를 압도한다. 더 많은 좋아요, 더 많은 공유수, 더 많은 댓글들...가짜 뉴스가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진짜 뉴스를 밀어냈다. 새로운 기술이 뉴스 시장을 왜곡한다.

https://www.buzzfeed.com/craigsilverman/viral-fake-election-news-outperformed-real-news-on-facebook?


페이크 뉴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주류 언론들이 대안 언론을 페이크 뉴스로 규정해 마녀 사냥한다’며 비난받기까지 한다. 페이크 뉴스를 만들어 유통시킨 사람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당당히 이렇게 말한다. "트럼프는 내 덕분에 백악관에 입한 거죠." ("Facebook fake-news writer: 'I think Donald Trump is in the White House because of me'")

 

마티 배런은 새로운 기술이 휘발성 강한 메시지들을 속보로 전파하는 데 쓰일 뿐 사건의 맥락과 이면을 파헤치는 것은 결국 시간을 들여 지적인 노동을 수행하는 전통적인 저널리스트들의 몫이라 주장해온 저널리스트다. “‘기차를 타고 있는데, 고장이 났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트윗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기차가 왜 고장이 났는지를 누가 밝혀줄까요?”라고 반문하며 새로운 기술 시대에도 전통적인 저널리즘 가치는 유효하다는 입장에 서 있던 사람인데, 이런 그의 신념은 트럼프 시대를 맞이해 좀 더 견고해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 그의 눈에, 기술을 통해 진실을 발굴하고 유통시키고 있는 '주갤러'들은 어떻게 비춰질까?


다시, 대성당들의 시대

미디어는 이제 동일한 사실을 둘러싼 정파 간 해석 전쟁에서, 무엇을 사실로 믿을 것이냐는 일종의 종교 전쟁으로 옮겨가고 있다. 거짓으로만 엮인 사실도 어느 순간 특정 집단의 믿음이 된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진실이라 믿는 현실, 그 현실을 과연 거짓이라고 할 수 있을까?”(파하드 만주, 『이기적 진실』, 권혜정 역, 비즈앤비즈(2014), p.193)


신자와 불신자의 시대, 고백과 순교의 날들, 박해 받을수록 강해지는 믿음….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6장 16절은 이 시대의 저널리스트들에게도 유효하다. 마티 배런이 링크한 글의 메시지 - ‘너를 믿는 이 없을지라도 사명만은 완수하라’ -와도 맥이 닿는다. 어쩌면 미국의 저널리스트들은 다시 카타콤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미 그들은 '레거시'의 영역에 있고 한편으로 그들만큼 성장해 그들을 공격하면서 그들만큼 대중의 믿음을 받는 가짜뉴스 혹은 대안뉴스들과 경쟁하고 있는, 그러다가 다같이 무너질지도 모를 대성당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종교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그리고 다시 대성당들의 계절을 맞이한 미국.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시민이 기술을 통해 저널리즘의 가치를 수행하고 있는 한국의 풍경. 그래서 불안하다. 되묻게 된다. 우리는 이제야 근대를 맞이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버려 어쩌면 금방 다시 대성당들의 시대를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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