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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Feb 17. 2024

일상이란 반복이 아닌 변주의 연속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퍼펙트 데이즈>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영화상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개봉 전 아카데미 기획전을 통해 미리 보았습니다. 영화 전체가 일본어로 이루어져 있기에 일본 대표작으로 출품되어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지만 이 영화는 일본과 독일의 합작영화인데, 바로 칸영화제 3회 수상에 빛나는 독일 출신의 거장 감독 빔 벤더스가 연출했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비일본인인 것과 달리 영화는 내내 도쿄에 거주하는 평범한 중년 남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이색적으로 다가오지만, 그래서인지 영화가 보여주는 한 남자의 삶은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이면서도 꽤나 생경합니다. 기존의 일본영화가 보여주지 않았던 손길로 빚어내는 어느 일본 남자의 일상은, 국적의 한계를 떠나 보편적이고 무한한 감동으로 와 닿습니다.


중년 남자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는 도쿄의 공중 화장실 청소부입니다. 자그마한 집에서 홀로 살아가는 그의 하루 일과를 소개하자면 대략 이렇습니다. 거리에서 비질 소리가 슥슥 들리는 새벽 즈음 일어난 히라야마는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양치질을 하며 출근 준비를 합니다. 작업복을 갖춰 입고 집밖을 나서는 그는 어느덧 머리 위로 내리쬐는 아침 햇살을 잠시 음미한 다음, 집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차에 올라타고는 좋아하는 록 음악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를 틀면서 출근길에 오릅니다. 때론 홀로, 때론 동료와 함께 오전 청소를 하고 나면 점심시간이 되는데, 그때는 포장해 온 점심거리를 들고 나무가 우거진 공원 벤치를 찾아 앉습니다. 그러고는 가지고 온 필름 카메라로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순간을 기록하죠. 어느덧 오늘 일이 끝나 귀가하면, 히라야마는 동네 목욕탕에서 하루의 피로를 푼 다음 전철역 옆의 단골 식당을 찾아 '오늘도 수고많으셨다'는 주인장의 인사와 함께 저녁을 먹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이부자리에 엎드려 책을 읽다 잠이 들면서 하루가 마무리되죠. 휴일에는 일주일간 찍힌 필름 카메라 속 사진을 현상하고, 빨래방에 가서 밀린 빨래를 돌리는 동안의 용무를 봅니다. 한편으로는 근처에 있는 단골 선술집을 찾아 사장과 자잘한 이야기를 나누며 한잔을 즐기기도 하고, 책을 다 읽었을 때에는 단골 서점을 찾아 새로 읽을 책을 사기도 하죠. 이런 일상이 거듭되는 가운데, 때때로 새로운 사람이 끼어들거나 새로운 상황을 만나고, 그들 대부분은 히라야마를 은은히 미소짓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해외 여행을 갈 때면 여러 도시나 나라를 하루이틀 간격으로 찍고 넘어가는 방식보다는 한 도시에 일주일 정도는 머물러 보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한 도시의 일주일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이 정도면 지구 반대편의 어느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늠이나마 되겠다 싶고, 그러면 여행은 단순한 휴가를 넘어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를 배우게 되는 견문의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덕에 그 도시와 나라의 인상은 더욱 진하게 남고, 내적 친밀도는 더 강해지죠. 갑자기 제가 해외 여행을 떠나는 방식을 이야기하게 된 이유는, 이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우리에게 인물과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히라야마라는 인물의 삶에 아주 잠시나마 들어갔다 나오는 느낌을 전하는 것이죠. 히라야마의 일상이 어떤 내러티브를, 기승전결을 지니게 되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 합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어느 화장실 청소부의 삶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흔히 상상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가 무슨 돈이나 시신을 발견하는 식의 극적인 지점이 존재해야만 영화로 다룰 수 있다고 흔히들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퍼펙트 데이즈>가 보여주는 히라야마의 삶에는 정말로 사건이 없습니다. 어쩌다 비일상적인 인물이나 상황이 등장하지만 이런 것들을 우리가 '사건'이라고 부르지도 않고요. 영화는 일주일 남짓 되는, 여러 곡절이 있었고 있게 될 히랴아마의 긴 삶 중 극히 일부를 똑 떼어다가 어지간한 생략 없이 그 시간의 궤적을 일일이 짚어냅니다. 때문에 관객은 만든 이의 입맛대로 (거의) 편집되지 않은 히라야마의 삶을 어깨너머로 '살아보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는 일본이 아닌 독일에서 온 이방인인 빔 벤더스 감독의 시선을 빌린 덕에 더 투명하게 그려지는 듯도 합니다. 같은 일본인이 그렸다면 은연중에라도 들어갔을지 모를 지역적, 사회적, 역사적 의미 부여까지도 모두 걷어냈으니 말이죠.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 2023)


히라야마의 일상은 그가 몹시 말수가 적다는 것 정도가 개성이라면 개성일 정도로 이야깃거리로 삼을 만한 구석이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홀로 화장실 청소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삶에 만족하게 된 사연이 있을 것임을 짐작케 하는 순간이 잠시 나오지만, 그마저도 영화는 스쳐 보내며 오히려 거리를 두려 합니다. 영화는 오로지 히라야마의 '오늘'에만 주목하죠. 히라야마의 며칠간을 건너다 보며 느끼게 되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일상 모든 순간에 뭐라도 대충 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직업인 화장실 청소 일은 물론이거니와, 일 외의 시간에서 자기 앞에 있고 자기를 둘러싸는 모든 것에 마음을 다해 몰입합니다. 그렇게 그가 온 마음으로 몰입하는 순간에는 출근하러 집을 나설 때마다 항상 하늘을 올려다 보며 미소 짓는 아침, 조용히 식사하는 와중에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만나면 카메라에 정성껏 담을 생각에 한껏 들뜨게 되는 점심, 시끌벅적하게 저마다의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들을 보며 그들 각자의 의미 있는 순간이 있을 것임에 흐뭇하게 웃음 짓는 저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별다른 이벤트 없이 반복되는 듯한 일상을 반짝이며 채우고 있는 히랴아마의 그 '마음을 다하는 순간'들을 짚다 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하루의 일과 속에서도 그의 눈에는 오직 지금이어야만 만날 수 있는 순간들이 채워져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머리 위에 내리쬐는 햇빛도, 바람에 흔들리며 순간순간 다른 모양을 만드는 나무와 햇살도, 맨날 만나는 사람들이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도 어제가 오늘과 같지 않았을 것이고 내일이 오늘과 같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알기에 하루하루를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날들로 온전히 만끽하는 히라야마의 모습을 보면서, 모든 관객은 자신의 삶을 대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매 순간순간 대체할 수 없는 지금과 만나게 되는 우리의 삶을 말이죠. 


주인공 히라야마를 연기하는 야쿠쇼 코지는 히라야마의 삶을 영화 안에 고귀하고 소중하게 구현된 예술 작품이자, 동시에 우리들 중 누구의 삶이라도 대입해도 좋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히랴아마가 지극히 과묵한 성격이어도 관객은 그가 입밖으로 내지 않는, 그 안에서 오히려 더 격렬하게 일렁일지도 모를 감정을 헤아려야만 하는데 야쿠쇼 코지는 말을 거치지 않고도 그 모든 감정을 헤아리게 만들어줍니다. 매일마다 빤하게 만나는 순간 앞에서도 매번 반짝이는, 단순한 한 단어짜리 표현으로 정의할 수 없는 뒤섞인 희로애락의 풍경을 얼굴에 담아내며 보는 이의 마음을 수시로 벅차오르게 합니다. 일상의 순간마저도 불쑥불쑥 물들이는 사색의 공기를 포착해내는 빔 벤더스 감독의 터치를 만나, 야쿠쇼 코지는 배우의 지극한 관록이 곧 우리의 가장 평범한 순간을 오롯이 빚어낸다는 진실을 보여줍니다. 


<퍼펙트 데이즈>가 찾아오는 모든 순간에 감동하는 히라야마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부단한 일상은 변주이지 반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 한 순간도 어제 혹은 내일과, 1시간 혹은 1분 전과 똑같은 것은 없으므로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처음 만나는 감정과 감흥이 무한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영화가 제목에 떡하니 써놓고 우리에게 뭘 보여줬지 싶었으나 실은 이미 빼곡해 있음을 알게 되는 '퍼펙트 데이즈', 완벽한 날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영화가 끝나면 우리 또한 보며, 들으며, 걸으며, 그렇게 무수한 '새로운 순간', '완벽한 날들'을 찾아나서게 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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