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만 Feb 26. 2024

파묻은 깊이만큼 파고드는 이야기의 확신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파묘>

<파묘>(Exhuma, 2024)


영화 <파묘>의 장재현 감독은 단편 '열두번째 보조사제'부터 장편 '검은 사제들', '사바하'에 이어 이 영화까지 줄곧 오컬트 장르 영화만을 만들어왔는데, 이 정도로 하나의 세분화된 장르를 일관되게 추구해 온 국내 감독은 유례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 <파묘>에까지 이르니, 감독이 오컬트 장르를 줄곧 추구해 온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오컬트 호러'가 아닌, 스릴러적 요소를 동반한 '오컬트'물로서 등장한 이번 <파묘>는 가톨릭과 불교를 거쳐 한국의 (특히 땅과 얽힌) 무속신앙을 두루 다루며 인간과 역사를 해석하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오컬트 장르를 톡톡히 활용합니다. 그 취지를 명확히 하고 있는 감독의 확신에 힘입어, 거침없이 파내려가는 이야기는 큰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짝지어 일하는 젊은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은 멀리 LA에 거주하는 부유한 한국계 가족으로부터 거액의 의뢰를 받습니다. 갓난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는데, 아기 아버지인 지용(김재철)은 자신의 아버지 즉 아기의 할아버지 대부터 장손에게만 원인불명의 병이 전해내려 왔다고 말합니다. 자신 또한 그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데 아기에도 병이 대물림된 것 같다는 거죠. 화림은 조상의 묫자리가 잘못되어 그 후손에게 생기는 액운, 즉 '묫바람'이 원인일 것으로 추측하고 의뢰인 가족에게 조상의 묘를 옮길 것을 제안합니다. 의뢰인 가족은 그런 화림의 제안에 응하되 조건을 거는데, 관을 절대 열지 말 것이며 묘에서 관을 꺼내면 관째로 화장시키라는 것입니다. 한편, 화림은 알고 지내던 이름 있는 풍수사 상덕(최민식)과 장의사 영근(유해진)을 찾아가 이 이장 일을 함께 할 것을 제안합니다. 거액의 돈을 벌 생각에 그들은 묘지로 향하지만, 절대 사람이 묻힐 수가 없는 자리에 들어선 묘에 의문을 품습니다. 거기에 상덕은 여기가 '악지 중의 악지'라며, 묘를 파냈다 누가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며 화림의 제안을 거절하려 합니다. 그러나 화림과 의뢰인의 설득으로 그들은 대살굿과 함께 이장을 위한 파묘에 돌입하고, 그 이후 '험한 것'이 무덤 밖으로 나와 그들을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파묘>(Exhuma, 2024)


<파묘>에 대해 가장 먼저 오해할 수 있는 점 하나부터 바로잡자면, 이 영화는 '오컬트'물이지만 '오컬트 호러'물은 아닙니다. 소재 특성상 스릴러적 긴장감을 유발할 수 밖에 없지만 공포감을 유발하려고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컬트'의 사전적인 의미는 '심령이나 유령 현상을 연구하고 그 원리나 규칙을 발견해내려는 신념'인데, 그 신비한 특성때문에 당연스레 호러 장르와 결부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오컬트 호러'라는 호러 하위장르도 생겨났고요. 그러나 <파묘>는 이런 통념과 달리 '오컬트 호러'가 아닌 '오컬트 스릴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내리 세 편의 장편영화를 오컬트물로 만들어온 장재현 감독이 오컬트를 공포와 신비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화에서 오컬트는 세계와 인간을 해석하는 도구, 문제가 발생했을 때 분석하고 해결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이 <파묘>를 통해서 더욱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주인공들이 파묘를 실행하는 전후로 생겨나는 긴박한 상황과 불가사의한 현상을 다루는 영화의 전반부는, 우리가 오컬트물에 으레 기대하는 긴장감과 스산함을 한껏 드러냅니다. 그러나 영화가 풀어내려는 진짜 이야기는 이러한 전반부를 지나 장르를 완전히 전환하다시피 하며 돌입하는 후반부에 있습니다. 이런 '장르 전환'이 사뭇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영화가 소재로 삼은 것이 다름 아닌 '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납득할 수 있는 전개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발굴하려 땅을 팔 때 어느 지층을 건너뛸 수 없이 지표면에서부터 차례차례 파들어가야 하듯, 영화는 그 켜켜이 쌓인 지층처럼 땅이 인간의 역사 또한 켜켜이 품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영화는 감독이 치열하게 연구했을 풍수지리학과 무속신앙의 요소를 꺾일 줄 모르는 기세로 그리며 오컬트 장르로서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여러 종류의 '믿음'을 이야기했던 감독이 이번에는 다름아닌 '땅에 관한 믿음'을 이야기하기에 가능한 화두를 꺼내며 역사적 접근을 시도합니다. 이는 영화적 상상력이 당연히 반영된 부분이기 때문에 그 상상력이 재현되는 방식에 있어서 호불호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세대를 초월하여 우리가 품고 있을 법한 땅에 관한 믿음과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 담긴 역사를 잇는 시도에서 보여지는 머뭇거림 없는 힘은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런 인상을 남기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또 다른 부분은 영화가 취하는 직업적 관점입니다. 풍수사, 무속인, 장의사의 팀플레이를 영화는 초자연적 관점이 아닌 직업적 관점에서 다룹니다. 그들의 믿음이 미신인지 속설인지, 그래서 위협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믿음이 흔들리는지 유지되는지, 그에 따라 공포가 어떻게 확산되는지 같은 것은 따지지 않습니다. 다만 적게는 10여년, 많게는 40여년동안 쌓인 경험이 만든 지식과 신념을 동력 삼아 각자의 방식으로 위기를 타개해 나가고 사건을 매듭짓는 프로페셔널들의 집념에 주목할 따름입니다. 과학과 이성 너머의 일을 다루는 사람들로서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헬스장에서 무게치고 스피닝하다 일하러 가는 무속인들처럼 현실과 나란히 호흡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정신은 오컬트 장르의 장인이 된 감독의 신념과 이어져 이상스런 현상을 확신에 찬 의지로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 확신이 있었기에 이야기가 뜻밖의 국면으로도 지체없이 나아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묘>(Exhuma, 2024)


이렇게 담대하게 극을 전환시키고 메시지를 꺼내 보일 수 있는 것은 감독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진정성을 유지할 줄 아는 배우들의 심지 또한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파묘>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캐릭터 앙상블은 일급입니다. 풍수사 상덕 역의 최민식 배우는 쇠처럼 강건하게 장면장면의 중심을 잡으며 영화를 이끌어 갑니다. 나서서 에너지를 뿜는 대신 에너지들이 마음껏 발산될 수 있는 두터운 장을 만들어내는 리더 역할을 톡톡히 하죠. 한편 무속인 화림 역의 김고은 배우는 불처럼 휘몰아치며 극을 움켜쥡니다. 굿 장면 등 가장 임팩트가 강렬한 순간에서 그야말로 장면을 장악하며 에너지를 뿜어내죠. 장의사 영근 역의 유해진 배우는 흙처럼 찰기있게 영화를 매만져 줍니다. 긴장 일변도일 수 밖에 없는 영화 속에서 비교적 부드러운 순간들을 만들어내면서도 중심을 지켜주죠. 여기에 무속인 봉길 역의 이도현 배우가 바람처럼 유연하게 나부끼는 터치로 풍성함을 더합니다. 과묵함과 다정함, 날카로움과 단단함을 모두 그려내며 영화의 에너지에 일조합니다. 개성이 뚜렷할 뿐만 아니라 모호하게 그려지지도 않은 캐릭터의 성향들이 독특하면서도 믿음직한 조화를 이루며 후반부의 과감한 전개에도 기꺼이 합류할 수 있게 해줍니다.


<파묘>가 보여주는 '장르 드리프트'는 역설적으로 장재현 감독이 오컬트 장르의 달인으로서 그 장르에 대한 신념이 누가 뭐래도 뚜렷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는 신비한 탐구가 아니라 혼돈에 빠진 세상을 해석하는 신비한 방법으로서 오컬트를 다루어 온 감독이, 시간을 따라 인간과 세계의 역사를 물리적으로 품을 수 밖에 없는 땅을 소재로 우리가 오랫동안 품어온 고통과 한, 그리고 신념을 줄곧 이야기한다는 것은 영화 내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폭발하고 이야기가 거의 '널뛴다' 싶게 방향을 트는 와중에도 영화가 옆으로 샐 줄 모르는 몰입도를 자랑한다는 것은, 만든 이의 그러한 확신에 찬 기세 덕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파묘>는 그렇게 보기 드문 에너지로 관객을 압도하는 기운을 지님과 동시에 응어리를 해소하는 힘 또한 과시하는 영화입니다. 


<파묘>(Exhuma, 2024)


매거진의 이전글 완전하게 파괴된 후 완벽하게 일어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