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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Aug 11. 2024

떠밀려 온 바다 위 소년은 어떻게 선장이 되었나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이오 카피타노>

<이오 카피타노>(Io Capitano, 2023)


이탈리아 영화 <이오 카피타노>는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배우을 수상하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영화상 후보에 오른 작품입니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연출로 세상의 그림자를 조명해 온 이탈리아의 거물 감독 마테오 가로네가 이번 영화를 통해 들여다 본 곳은 아프리카 난민 사회입니다. 꿈을 위해 '자발적 난민'의 길을 선택한 소년이 겪는 지난한 여정은 똑바로 보기 힘들만큼 처절한 현실과 애틋한 환상을 넘나드는 가운데, 그 속에서도 끝내 방향키를 놓지 않고 운명의 주인이 되어 가는 소년의 모습을 통해 현실을 고발함은 물론 시대를 초월한 인간적 감동을 안깁니다. 영화가 아니고서야 만날 수 없는 세상의 다른 풍경은 때로 영화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진실한 생각거리를 남기기도 합니다.


세네갈 소년 세이두(세이두 사르)는 세계적인 뮤지션이 되는 것이 꿈입니다. 사촌이자 또래 친구인 무사(무스타파 폴)와 걸핏하면 유튜브 쇼츠로 세계의 다양한 음악들을 즐기며, 일상의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곧잘 노래로 만들어 버스킹을 하기도 합니다. 엄격한 어머니와 사랑스런 동생들 등 가족들과 함께 하는 세네갈에서의 삶은 충분히 행복하지만, 역시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네갈은 너무 작은 곳입니다. 언제부턴가 무사가 세이두에게 함께 지중해 건너 유럽으로 가자고 했고, 둘은 일을 하면서 유럽으로 갈 돈을 모으는 중입니다. 어머니는 물론 주변의 어른들도 이상하리만치 하나같이 가지 말라고 만류하지만, '백인 팬들에게 싸인해주는' 꿈을 꾸며 결국 가족 몰래 길을 나서는 소년들. 리비아를 거쳐 사하라 사막을 건너 지중해로 향하는 여정은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험난합니다. 몇날며칠 사막 위를 걸어야 하는 여정은 개인의 안전을 살뜰하게 보장할 만큼의 여유가 없고,  몰래 길을 떠나는 그들을 포착한 군경은 순순히 잡혀갈지 돈을 줄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난민들과 그 가족의 주머니를 노리고 고문하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마피아들의 마수까지 덮치며 꿈을 좇아 온 소년들을 생지옥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시들지 않는 꿈을 향한 간절함은, 친구를 향한 순수한 애정은, 손을 내미는 희망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렇게 혹독한 바다로 떠밀려 나온 소년은 점점 스스로 나아가는 선장이 되어갑니다.


<이오 카피타노>(Io Capitano, 2023)


우리가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에서 흔히 접하는 난민 문제는 전쟁이나 기근처럼 대개 그곳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얽혀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난민들이 있을텐데도 그 개개인의 이야기는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이슈라는 하나의 덩어리 속 이름 없는 구성 요소로 간주되곤 하죠. 그러나 <이오 카피타노>는 이런 정치적, 사회적 특수성보다 훨씬 보편 타당적인 시선으로 난민 문제에 접근합니다. 일단 영화 초반의 장면들은 세이두와 무사가 살고 있는 세네갈의 현실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거듭 보여줍니다. 물론 형편이 넉넉치 않을 수 있겠지만 가족들은 충분히 단란한 일상을 보내고 있고 그들이 연례 의식처럼 거리에서 벌이는 춤사위에는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싶을 만큼의 에너지마저 느껴집니다. 단지 소년들에겐 그런 육신과 정신의 안위를 넘어서는 꿈을 향한 갈망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에 세네갈이라는 곳은 너무 유한하다는 명확한 현실만이 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해외로 나아가듯 그들 역시 뮤지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유럽으로 가겠다고 결심하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자아실현을 향한 당연한 여정을 차단하는 세계의 병폐입니다. 퀘스트 하나를 통과하면 더 어려운 레벨의 퀘스트가 등장하는 게임처럼, 소년들을 기다리는 건 점점 더 비열하고 폭력적인 현실입니다. 오도가도 할 수 없는 난민들의 처지를 악용해 그들을 착취하는 행태는 자신들만의 요새를 구축하여 공장처럼 전개해나가는 마피아들은 물론 군경까지 잠식해 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게 아니라 그저 꿈을 위해 좀 먼 길을 떠나온 것이라 믿었던, 그만큼 무방비 상태인 소년들에게 들이닥치는 그 현실은 그래서 더 충격적이고 막막합니다. 소년들이 마주선 곳은 바야흐로 머나먼 사막길을 걷다 끝내 살리지 못한 누군가를 향한 죄책감을, 저 멀리 고향에서 애타게 자신을 기다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꿈으로나마 해소해야만 버틸 수 있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현실을 고발하겠다는 명분으로 인물들을 앞장서서 착취하지 않습니다. 소년들이 여러 곳을 거치며 얼마나 고된 나날들을 보냈는지는 그들에게 가해졌을 폭력이 아니라 그들이 얻게 된 상처로만 보여줄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착취의 무게를 강조하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쉽사리 굴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착취보다 무거운 것이 무엇인지를, 그것은 바로 꿈을 향한 결연한 의지로 스스로 일어선 이들의 발걸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년들이 감내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현실이 그들에게 짙은 생채기를 남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훼손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지닌 선량한 의지입니다. 그 중에서도 주인공인 세이두가 보여주는 것이 적나라한 현실에 굴복한 끝에 일어나는 '변질'이 아니라 굴복하지 않은 끝에 일어나는 '성장'이라는 점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비틀거리던 걸음이 더욱 또렷해지고 흔들리던 눈빛이 더욱 강인해질 뿐, 마음에 품은 꿈을 향한 열망과 선의는 결코 바래지 않습니다. 그처럼 꿈과 선의로 움직이는 소년이 그 의지를 알아보는 현명한 어른들과의 만남을 겪으면서, 더 이상 떠밀려 나와 착취당하기만 하던 존재가 아니라 앞서 나아가며 타인의 생의 존엄까지 지켜내는 선장으로 커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을 이탈리아인인 감독은, 마치 어른으로서 마땅히 책임있게 건네야 할 희망이자 응원인 듯, 세상을 향한 경종인 듯 소년들의 여정에 이처럼 힘을 싣습니다.


<이오 카피타노>(Io Capitano, 2023)


배우들의 실제 이름과 극중 인물들의 이름이 동일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영화의 두 주인공 세이두와 무사를 연기한 세이두 사르, 무스타파 폴은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이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스 속 삽화로만 간간히 다뤄져 깊이 들여다 보지 못했던 아프리카 난민들의 현실을, 그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꿈을 표현하는 혼신의 연기로 깊은 감동을 줍니다. 특히 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이끌어 가는 세이두 사르의 연기력은 베니스 영화제 신인배우상을 타고도 남겠다 납득될 정도입니다. 처음엔 친구의 손에 이끌려 불안감 속에 길을 나서는 연약한 눈빛을 한 소년이었던 이가 고초를 겪으며 이제는 친구를 구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인물로 거듭나고, 마침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저없이 전할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선장'이 되어가는 과정은, 한편으론 세상 전체에 외치는 것도 같은 영화의 마지막 대사로 화룡점정을 찍으며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이오 카피타노>는 꿈을 이루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것마저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젊은 난민들의 현실을 통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젊은이들이 마주하는 꿈과 현실의 문제를 난민 문제와 결부시킨 사회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꿈을 향한 의지를 꺾지 않고 본연의 성정을 훼손시키지 않는 숭고한 인간의 여정을 통해 보통의 우리들 또한 투영시키게 하는 보편적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제목인 '이오 카피타노'는 '나는 선장이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입니다. 끝내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파되는 이 말을 들으면서, 대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려 다니기 십상인 세상 속에서 나는 언제 스스로 방향키를 쥘 수 있을까, 언제쯤 내가 선장임을 주저없이 외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오 카피타노>(Io Capitano,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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