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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Sep 08. 2024

해석의 여지조차 불허하는 상상 너머의 상상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Kinds of Kindness, 2024)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는 올 초 국내에 <가여운 것들>을 선보였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새 영화로 올해 칸영화제에서 공개되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송곳니> 이후 모든 작품이 국내에서 극장 개봉했던 감독의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극장 개봉 없이 디즈니플러스 공개로 바로 직행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니 그럴 만도 합니다. 상업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옴니버스 형식에, 그런 만큼 더욱 대담한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을 구사하는 감독의 모험적인 시도, 감독 필모그래피 중 가장 긴 러닝타임(164분)까지. <가여운 것들> 후반작업 중에 촬영된 영화답게 상업적-예술적 야심보다 창작자로서의 창의적 야심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쉽지는 않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해석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난데없는 이런 구성으로 인해 오히려 영화는 넋을 놓고 그저 따라가게 되는 마성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영화는 같은 배우들이 각기 다른 인물들을 연기하는 세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번째 이야기인 'R.M.F의 죽음'에서 로버트(제시 플레먼스)라는 남자는 레이먼드(윌렘 대포)라는 상사의 지시에 따라 몇년째 자신의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상사의 지시를 참다 못해 거부하게 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고, 지시 없는 삶의 와중에 리타(엠마 스톤)라는 여자를 만납니다. 두번째 이야기인 'R.M.F는 날고 있다'에서 경찰인 다니엘(제시 플레먼스)은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행방불명되었던 아내 리즈(엠마 스톤)와 극적으로 재회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기 눈에 있는 '리즈같이 생긴 사람'이 어쩌면 자신이 아는 리즈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힙니다. 세번째 이야기인 'R.M.F가 샌드위치를 먹다'에서 어떤 기이한 집단에 속해 있는 에밀리(엠마 스톤)라는 여자는 동료 앤드류(제시 플레먼스)와 함께 어떤 여자를 찾고 있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그 여자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다니는 가운데 이 일을 위해 뒤로 했던 가정에 대한 미련이 자꾸 그녀의 곁을 맴돕니다. 이 세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인물들의 전혀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 하지만, 각 이야기의 부제가 말해주듯 일면 연결되는 구석이 있습니다.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Kinds of Kindness, 2024)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들 중에 하나도 불편하거나 난해하지 않은 경우가 없긴 했습니다만,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는 그 정도가 특히 심한 편입니다. 이유는 감독이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라, 감독의 상상력이 소위 '근본없기'가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기이한 상황이 주어지는데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상관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전하는 쪽지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심지어 하루하루가 쌓여서 결혼과 내집마련 등 인생의 결정적인 진로가 되는) 남자가 등장하지만 그가 어쩌다가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실종되었다 돌아온 아내의 정체를 의심하는 남자가 무슨 이유로 저렇게까지 행동하는지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주지 않습니다. 여자가 자신의 생애까지 내팽개쳐가면서 누군가를 찾게 만드는 기이한 집단의 행실이 뜨악스럽게 펼쳐져도 그 실체는 알 수 없습니다. 이상한 상황에 처한 이상한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상한 선택과 행동을 하지만 왜 그들이 그러는지 해답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각각이 50여분 남짓한 그 이야기들이 명쾌하게 해석될 리가 만무합니다. 한편으론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조차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논리와 상식의 한계 너머로 뻗어나가는 이야기가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전개되다 보니 어느 순간이 되면 머리를 부여잡길 포기하고 눈앞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하염없이 따라가 보게 됩니다. 어떻게 되는지, 어디로 귀결되는지 지켜보자 싶은 마음으로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이름난 배우들이 세 이야기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맡으며 등장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건조한 연기 톤 또한 기묘하게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전후 맥락에 대한 상황 없이 불쑥 틈입한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을 보여주는 것만 같은 그들은 우리가 아는 그 배우들이 아닌 것처럼, 마치 얼굴만 우리가 아는 그들이지 실상은 딴 사람인양 넋을 놓고 인물들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이 영화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이 아니라 다른 어떤 구성요소인 것처럼, 캐릭터를 표현하거나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그저 어떤 세계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배우들이 보여주는 세계는 간혹 맥락없이 뜨악스런 장면들이 심드렁하게 나타날 만큼 혼돈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인 것만 같습니다. 그 혼돈과 부조리가 너무나 공기처럼 보이지 않지만 자욱하게 깔려 있어서, 그 속에 휩싸인 인물들이 철저히 무감각해질 정도의 세계 말이죠. 상상의 강도와 향방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감독의 연출 아래 가면처럼 얼굴을 바꾸는 배우들의 이야기 보따리를 따라가다 보면, 장면 장면의 의미와 인물들의 속내를 해석하진 못해도 그 혼란스런 세계 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제목의 의미를 짐작하게 됩니다. 부조리한 세계 속 환장스런 인간들이 벌이는 소동(?) 속에서 어느덧 뜻하지 않게, 구름처럼 흐릿하지만 뭉게뭉게 나타나는 어떤 종류의 '친절', '호의'에 관한 풍경이 말입니다.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Kinds of Kindness, 2024)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쟁쟁한 배우들이 이런 밑도끝도 없는 이야기를 무슨 이유로 덜컥 연기하겠다고 받아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일수록 연기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배우들이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연기를 통해 깨닫고 안도하게 됩니다. 감독의 전작 <가여운 것들>로 두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감독의 후속작인 <부고니아>(한국영화 <지구를 지켜라!> 리메이크작)에도 출연할 만큼 감독의 페르소나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엠마 스톤은 이 영화 속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들 속에서도 대신할 수 없이 매니악한 존재감을 발휘합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만만치 않은 수위의 연기를 보여주는 가운데, 외적인 수위는 어느새 잊혀지게 할 만큼 강렬한 캐릭터의 개성을 건조한 터치로 선보이며 감독의 색깔을 고스란히 재현합니다. 한편 이 영화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한 제시 플레먼스의 활약 또한 인상적입니다. 매 에피소드마다 전혀 다른 사람인 것만 같은 변신을 보여주는 그는 감독의 상상력에 담긴 통렬한 광기를 실어내는 최상의 매개체로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세계에 진입한 또 한명의 훌륭한 페르소나를 발견한 느낌을 줍니다. (그 역시 감독의 후속작 <부고니아>에 출연 예정입니다.) 이외에도 여전히 음흉하고 우스꽝스러운 인물을 능청스럽게 보여줄 줄 아는 윌렘 대포와 비교적 신예임에도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뿜어내는 마가렛 퀄리를 비롯해 홍 차우, (<엘리멘탈>의 '웨이드' 성우로 익숙할) 마무두 아티, 조 알윈, 헌터 샤퍼 등 역할의 비중과 상관없이 장면장면을 비범한 에너지로 채우는 배우들의 앙상블이 강렬합니다.


'친절함의 종류'라는 제목의 뜻처럼, 인간과 세상을 향한 뒤틀린 상상력을 주체할 수 없는 감독이 창의적인 야심을 한껏 담아 만들어낸 영화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에서는 일말의 친절함인 느껴지는 것도 같습니다. 이리저리 뜯어보며 함의가 무엇인지 헤아려볼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불가해한 상상으로 가득 채운 이 이야기 속에서 관객이 최후까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상상 속을 정처없이 누비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때론 더욱 뚜렷하게 고통을 느끼도록 후려치기도 하고 때론 현실에 가로막히는 지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돌파해 나가며, 불편하고 뒤틀린 순간들로 가득한 세상을 나름의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그 관점이라는 게 대단히 취향을 타겠지만, 모호한 분석을 유발하기보다 아예 몰입케 하거나 포기케 하거나 둘 중 하나일테니, 이것도 창작자가 수용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일종의 '친절함'이겠죠.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Kinds of Kindness,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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