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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Oct 13. 2024

이별은 잠시일 뿐 만남은 영원하기에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와일드 로봇>

<와일드 로봇>(The Wild Robot, 2024)


<슈렉>, <드래곤 길들이기>, <쿵푸팬더> 등 20여년의 시간동안 수많은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잊지 못할 이야기들을 선사해 온 드림웍스에게 이번에 나온 영화 <와일드 로봇>은 자체제작하는 마지막 애니메이션입니다. (이후 나오는 애니메이션들은 외주 제작사에 더 많인 의존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변화가 완성도와는 상관없을 수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 보여 온, 성인 관객까지 보다 넓은 관객층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쾌하면서 보다 현실적이고 성숙한 작품 기조를 좋아했던 관객들에게는 아쉬운 소식일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와일드 로봇>은 마치 드림웍스의 '마지막 불꽃'인 것처럼 장엄한 광경과 섬세한 터치, 역동적인 볼거리와 사랑스러운 캐릭터, 그리고 감동적인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관객층의 마음을 굴복시킬 정도의 퀄리티와 매력을 모두 지닌 역작으로 나타났습니다.


가까운 미래로 보이는 어느 시기, 집안일부터 자잘한 부탁까지 구매자의 모든 것을 도와주도록 설계된 인간형 로봇 '로줌 유닛 7134'(루피타 뇽)가 배송 중 사고로 거대한 야생 섬에 불시착합니다. 구매자로부터 임무를 받아야만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로봇이지만, 사방이 동물들인 곳에서 구매자도 임무도 있을 리 없습니다. 일단은 주변을 탐색하고 학습하면서 로줌 7134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만, 동물들에게 그는 여전히 낯설고 위험하므로 기피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던 중 그는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채 둥지에 홀로 남겨진 기러기 알을 발견하고는, 임무삼아 그 알을 품고 부화시킵니다. 태어나 처음 본 존재이기에 아기 기러기는 당연히 로줌 7134를 엄마로 따르고, '로즈'라는 이름까지 붙여줍니다. 로즈 역시 그런 아기 기러기에게 부리가 밝은 색이라는 뜻의 '브라이트빌'(킷 코너)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요. 약삭빠른 악동으로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외톨이지만 브라이트빌 돌봄을 도와주기 위해 접근한 여우 핑크(페드로 파스칼), 일곱 자녀를 키우는 '독박육아' 경험자로 로즈에게 갖은 조언을 아끼지 않는 주머니쥐 핑크(캐서린 오하라) 등의 도움으로 로즈는 동족보다 유독 작고 약한 브라이트빌이 거친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하지만 브라이트빌은 철새이기에 겨울이 되기 전 스스로의 힘으로 날아서 무리를 따라 이동해야만 하는데, 로즈는 브라이트빌이 자기 힘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그리고 그를 품 안에서 떠나 보내는 것을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와일드 로봇>(The Wild Robot, 2024)


드림웍스는 <배드 가이즈>,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 등 최근에 나온 애니메이션에서 마치 물감으로 붓터치를 한 듯한 2D 질감의 3D 기술을 선보여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과거 디즈니, 드림웍스 2D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하는 심미적 요소들을 충실히 담으면서 3D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사실감과 역동성 또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터 브라운의 동명 아동 소설을 원작으로 한 <와일드 로봇>은 이러한 최근 작화법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는 영화가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로봇으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 초반 외딴 야생 섬에 도착한 로봇 로즈가 자연을 탐색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자연을 오브제로 두고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 구현력에 대한 일종의 쇼케이스같아 보입니다. 넘실대거나 철썩이는 파도, 우거지면서도 곳곳에 저마다 다른 모습의 디테일이 숨어 있는 숲의 때론 푸르고 때론 샛노란 전경, 로즈가 주변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상과 계절의 변화까지. 이후 로즈가 본격적으로 동물들의 세계로 섞여들고 드라마가 펼쳐지면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의 너른 품 속에서 기러기, 여우, 곰, 비버, 주머니쥐, 수달, 매 등 종을 막론한 갖가지 생김새의 동물들이 생기 넘치게 생태계를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이 사실적이고도 유머러스하게 펼쳐집니다. 이후 목격하게 되는 자연 밖의 다소 암담한 현실과 비교한다면, 이 자연은 주인공들에게도 지켜보는 우리에게도 그 자체로 낙원이나 다름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한편 로봇이 주인공인 만큼 메카닉 디자인과 액션 장면 연출 또한 간결하면서도 역동적인 볼거리로 눈을 즐겁게 합니다. 가정용 로봇이기 때문에 둥글고 친근한 생김새를 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모방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유연성과 민첩성 또한 확보되어야 하는 로즈의 특성으로 인해 우리는 다이내믹한 로봇 액션 또한 박진감 넘치게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와일드 로봇>은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사실 스토리만 들었을 때에는 할리우드의 숨겨진 걸작 애니메이션인 <아이언 자이언트>와 국산 애니메이션 히트작인 <마당을 나온 암탉>을 떠올리게 했고, 거기에 또 다른 감동 대작인 <드래곤 길들이기>의 크리스 샌더스 감독이 연출했으니 감동은 보장되고 예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곱씹어 볼 만한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어 감동의 크기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감정 없던 로봇이 새끼 기러기를 키우게 되면서 감정을 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는 로봇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에서 종종 봐 온 것이라 아주 새롭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 이야기를 모성과 자연의 섭리가 지니는 공통점의 측면에서 접근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애초에 로즈는 명령을 받아야만, 임무를 전달받아야만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로봇이었습니다. 그가 새끼 기러기 브라이트빌을 처음 키우게 된 것도 그를 해내야 할 '임무'로서 접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그러나 명령이 입력되면 결과값이 나오는 것으로 예상했던 커뮤니케이션에 사랑이라는 변수가 끼어들게 되면서, 로즈는 머리로 알고 있고 생각하는 것과 상관없이 마음으로 내가 움직일 수 있고 타인과 세계까지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때로 본능은 이성보다 저급한 것으로 취급받곤 하지만, 학습된 지식과 상관없이 사랑 받은 만큼 사랑을 주고 소중한 존재를 위해 당연한 듯 스스로를 헌신하는 자연의 본능은 이성보다 더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또한 로즈의 변화를 통해 알아갑니다.


<와일드 로봇>(The Wild Robot, 2024)


그러나 자연의 이치는 그 너른 품처럼 자비로운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 예외를 허용하지 않기도 합니다. 추운 계절이 되면 따뜻한 곳을 찾아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기러기들처럼 자연은 지속되기 위한 이별이 필요한 시점을 맞이하게 마련입니다. <와일드 로봇>의 배경은 야생이기에 이곳의 캐릭터들에게만 '행복하게 오래오래 함께 살았다'는 식의 인공적인 결말이 허용될 수는 없고 역시 언젠가 다가올 이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비극으로 다루지 않고 자연의 예외없지만 당연한 섭리로 여깁니다. 또한 언젠가 맞이해야 할 이별처럼, 그 이별 뒤에는 언젠가 맞이하게 될 만남 또한 기다리고 있을 거라 말합니다. 기러기들은 추워지기 전 터전을 떠날 수 밖에 없지만 그 말은 곧 따뜻한 계절이 돌아오면 그들 또한 돌아올 것이라는 뜻임을, 언제 끝날지 아득하기만 한 겨울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이는 곧 다시 봄이 찾아올 것이라는 뜻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니 이별 또한 잠시일 뿐, 살아있는 동안 만남은 언제고 계속될 것 또한 깨달아 갑니다. 우리의 유한한 삶을 채워나갈 끝없는 만남과 이별의 반복 속에서, 영화는 만남의 나날동안 서로를 향한 친절함으로 가능한 많은 것을 품고 체온을 나누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기러기들 또한 그 체온을 나누기 위해, 온기를 기억하기에 다시 엄마의 곁으로 돌아오는 것일테니까요.


영어에서는 흔히 자연을 '마더 네이처(mother nature)'라는 표현에서처럼 모성과 비유를 하곤 합니다. <와일드 로봇>은 자라난 마음을 지닌 채로 고장나지 않는 한 영원을 살 로봇과 계절에 따라 먼 여행을 떠나야만 하는 기러기의 이야기 통해 어쩌면 이처럼 모성과도 같은 자연의 본성, 자연과도 같은 모성의 본질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남기고 떠나간 듯했던 계절도 언젠가 돌아오듯, 떠나간 아이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늘 자리를 지키는 모성이 있기에 '마더 네이처'라는 표현이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헌신하는 모성만을 예찬하는 것을 넘어서, 수많은 만남과 이별로 채워진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우리로 하여금 '프로그래밍된 것' 이상의 것을 가능케 하는 모든 만남과 사랑을 예찬하는 <와일드 로봇>은 올해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꼽을 만한 영화입니다. 

<와일드 로봇>(The Wild Robot,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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