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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힘이 되는 29초를 되돌아보다

박카스 29초영화제 & 커피 29초영화제 역대 수상작 리뷰

by 김진만

부족하지만 29초영화제 명예홍보대사를 하면서 29초 분량의 영화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을 새삼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좋습니다. 무척 많은 분들이 만들어주시는 29초 영화 속에 담긴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이렇게 짧은 분량을 이렇게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니 하는 감탄과 더불어 나도 어쩌면 29초 정도는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괜한 호기심이 함께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지난 29초영화제에서 수상의 영광을 얻은 출품작들은 어떤 개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을지 궁금해졌는데요, 그래서 역대 29초영화제 수상작들 중 인상 깊었던 작품들을 간략히 리뷰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 중 최근 응모가 마감되었거나 진행중인 '박카스 29초영화제', '커피 29초영화제' 역대 수상작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박카스 29초영화제는 올해로 11회, 커피 29초영화제는 올해로 9회를 맞이한 만큼 다양한 수상자들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영화들을 각 3편씩 정리해 보았습니다.


[박카스 29초영화제 역대 수상작 베스트]



'대한민국에서 불효자로 산다는 것' (송원영 감독) - 제1회(2013년) 박카스 29초영화제 일반 우수상


아마도 박카스 29초영화제를 대중에 가장 많이 알린 작품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도 예전에 이 영상을 처음 봤을 때 전문 광고회사에서 만든 광고영상인 줄 착각했을 만큼 완성도와 임팩트가 뛰어났습니다. 직장인들로 가득찬 엘리베이터 안에 땀인지 빗물인지로 흠뻑 젖은 중년의 택배기사가 황급히 올라탑니다. 함께 탄 직장인들은 택배기사에게서 땀냄새가 나는 것에 대한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가운데, 뒤쪽에 선 한 여성은 택배기사가 마치 구면인 듯 하필 여기서 마주친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합니다. 그 여성을 목격한 택배기사는 아는 척하려나마는 듯 고개를 떨구죠. 뒤이은 장면에서 여성은 할말을 잊은 듯 정면을 바라보다 눈물을 떨구는 가운데 '대한민국에서 [불효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문구가 나타나며 이것이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였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리고 빗방울이 맺힌 종이에 적힌 '우리 딸 미안하다. 빗길 조심히 오려무나'라는 메시지와 함께 놓인 박카스 한 병으로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고생하는 아버지를 보고도 아는 척 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는 딸과, 그런 딸로부터 박카스 한 병이라도 받아야 마땅하건만 오히려 건네주며 미안하단 한 마디를 남기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때로 한없이 철딱서니 없게 되는 우리들을 지탱하게 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새삼 깨닫게 하며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제1회 박카스영화제 우수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출품된지 12년이 지났지만 지금 봐도 변함없이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이처럼 잘 만든 29초 영화는 어떤 상을 수상했는지와 상관없이 시간이 지나도 많은 이들의 인상에 깊이 남기도 합니다.



'나의 피로회복 정류장은 딸의 마음이다' (지승환 감독) - 제8회(2021년) 박카스 29초영화제 일반부 대상


29초영화제에서는 일상을 소재로 하여 감동 뿐 아니라 웃음을 주는 작품들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재치 있는 연출로 웃음과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면서 제8회 박카스 29초영화제 대상을 받았습니다. 엄마가 한숨 어린 가계부를 쓰고 있는 가운데, 하교한 딸이 달려와 "엄마가 수학성적 50점 넘으면 10만원짜리 가방 사준다고 했잖아~"라고 하니까 엄마는 혹시 딸의 수학 점수가 50점을 넘었는가 싶은 기대에 찹니다. 하지만 딸은 호기롭게 "그 돈 엄마 써!"라고 하며 수학 점수가 50점을 못넘었음을 암시하죠. 딸이 해맑은 표정으로 친구와 놀러 나가자 딸의 방에 들어간 엄마는, '엄마선물'이라고 적힌 종이 쪽지를 보게 되고 이를 펴보니 수학 점수 85점을 맞은 시험지가 들어있습니다. 비로소 딸의 기득한 속마음을 알게 된 엄마는 흐뭇한 웃음을 짓죠. 재치 있는 대사로 뜻밖의 웃음을 주는 전반부를 지나, 딸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후반부의 작은 반전이 드러나며 이야기는 웃음으로만 채워지지 않고 따뜻한 가족의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면서도 전형적인 감동 코드에 기대지 않고 웃음과 감동을 버무린 재치있는 연출로 완성도를 높인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같은 때' (황희지, 민유경 감독) - 제10회(2023년) 박카스 29초영화제 일반부 우수상


제10회 박카스 29초영화제의 주제는 '박카스가 있어 영화같은 하루'였는데요, 주제에 걸맞게 수상작들도 일상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개성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작품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평범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만들어가는 영화같은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뙤약볕 아래에서 힘겹게 농사일을 하고 있는 할머니가 알콩달콩 시골길을 거닐고 있는 젊은 남녀를 보며 "영화같을 때"라며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죠. 바로 그때 어디선가 할아버지가 나타나 박카스를 건네며 "힘들지? 우리 마실 갈까?"라면서 휴식 시간을 선사합니다. 할머니가 못 따는 박카스 뚜껑을 할아버지가 따주며 나란히 길을 걷는 가운데, 방금 전까지 할머니가 부러워했던 '영화같은 때'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직접 누리면서 '할멈, 지금 우리도 영화같애'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함께 작품은 마무리됩니다. 나이나 시공간과 상관없이 우리들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영화같은 때가 있음을 짧은 시간 안에 진솔하고 따뜻하게 전하는 이 작품의 백미는 역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연기일 것입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당사자 요청으로 성함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름 모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출연한 이 작은 영화가 지금도 우리에게 흐뭇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는 것까지가, 이 작품이 보여준 '영화같은 하루', '영화같은 우리의 인생'의 완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커피 29초영화제 역대 수상작 베스트]



'당신이 완성시킨 당신의 하루' (유제업 감독) - 제3회(2018년) 커피 29초영화제 일반부 대상


커피는 현대인들의 일상에 가장 친숙한 음료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요, 제3회 커피 29초영화제 일반부 대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그처럼 일상과 맞닿아 있는 커피의 이미지를 코믹하게 그려내 인상적이었습니다. 얼굴만 커피색인 한 남자가 바쁜 하루를 시작하는데, 커피 원두 형상의 얼굴을 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 모습에서 그가 다름 아닌 커피를 의인화한 캐릭터임을 알게 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능숙하게 밀려오는 업무들을 처리하고 틈틈이 자기 자신에게도 물을 주며 분주한 하루를 보낸 그는,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야 경직되어 있던 표정을 풀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때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 방울방울이 모여 비로소 하루의 피로를 위로하는 커피 한 잔이 됩니다. 오랜 시간을 거쳐 깊이 있는 맛을 품게 되는 커피처럼, 고단한 일상의 순간순간들이 모여 그렇게 우리의 하루가 완성된다는 작품의 메시지는, 커피의 특성을 우리의 일상과 절묘하게 결부시키는 한편, 자칫 소모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일상이 결국은 하루하루의 완성으로 채워진다는 위로 또한 전해줘서 인상 깊었습니다.



'커피로 회피' (선민수 감독) - 제7회(2022년) 커피 29초영화제 일반부 최우수상


제7회 커피 29초영화제 일반부 최우수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일상의 예술, 커피'라는 제목에 걸맞게 일상의 웃픈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감각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첫 장면에서 주인공은 커피 원두 사이에 누워 커피 원두의 감촉을 손으로 느끼며 풍미를 만끽하고 있는데, 곧 그것은 카페 알바 중인 주인공이 커피 원두 포대를 통으로 쏟는 바람에 벌어진 대참사(?)였음이 드러납니다. 너무나 큰 참사였기 때문인지 주인공은 체념한 채 쏟아진 커피 원두 더미에 누워 낭만을 만끽하더니, 커피 한잔의 여유까지 누립니다. 곧 사장님의 불호령과 함께 주인공이 자리를 비우는 사이 '커 보니, 피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는 커피 2행시로 작품은 끝을 맺습니다. 알바 중에 일어난 실수에서 비롯된 이야기이지만 현실적인 고충과 난관 극복의 이야기보다는 쏟아진 커피 원두 사이에서도 현실 도피의 낭만을 느끼는 주인공의 모습이 무엇보다 재치 있게 다가왔습니다. 마무리 또한 커피 2행시로 맺으며 독특한 예술 감각을 끝까지 보여주는 작품은, 마무리의 2행시처럼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는' 현실에 한 줌 낭만을 더해주는 커피의 매력을 새삼 일깨우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아버지와 커피타임' (이창수 감독) - 제8회(2023년) 커피 29초영화제 일반부 최우수상


커피는 사람들과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게 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제8회 커피 29초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그렇게 커피를 매개로 이뤄지는 대화의 순간을 가족 안에서 코믹하게 그려내며 웃음과 공감을 자아냈습니다. 대학생인 주인공이 집에 와서 반찬투정을 하자 엄마는 주인공을 가차없이 '생각하는 방'으로 보내버립니다. 다 큰 어른이 된 아들이 아직도 '생각하는 방' 같은 곳에 보내지는 것이 웃기다 생각 들던 차에 그 방에는 아버지도 앉아있으니 웃음이 배가됩니다. 본의 아니게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아버지와 아들은 모처럼의 대화로 서로를 알아가는 듯 하더니, 예정된 시간이 끝나자 아버지는 에누리 없이 방을 떠나고 방에는 아들 혼자 남습니다. 커피 하면 언뜻 떠올릴 수 있는 여러 이미지 중에 '대화' 정도를 남긴 채, 유쾌한 설정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동시에 가족 간에 대화는 (이를테면 커피 같은 수단을 통해서라도) 꾸준히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공감하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렇게 29초영화제 역대 수상작들 중 인상 깊었던 작품들을 살펴 보았지만 이들도 극히 일부이며, 다양한 파트너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29초영화제에는 저마다의 주제를 바탕으로 센스와 공감대, 연출력과 연기력을 겸비한 다채로운 작품들이 무척 많이 있습니다. 그 많은 작품들을 부담없이 언제나 즐길 수 있고, 우리들 또한 그런 작품들을 만드는 '감독'이자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점. 이것이 29초영화제의 독보적인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 역대 29초영화제 출품작 및 상영작은 29초영화제 홈페이지 내 '이구시네마'에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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