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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을 겪고도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그저 사고였을 뿐>

by 김진만
<그저 사고였을 뿐>(It Was Just an Accident, 2025)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그저 사고였을 뿐>은 이란 출신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으로 하여금 세계 3대 영화제(칸, 베니스, 베를린)의 최고상을 모두 수상하는 쾌거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 만들기 여정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은 영화 팬들이라면 익히 알 만한 사실입니다. 이란의 현 체제에 문제를 제기해 온 그의 행보로 인해 이란 정부로부터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체제에 반대하는 내용을 선전해 왔다는 이유로 교도소 복역, 자택 구금, 출국 금지 등의 처벌을 받아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와중에도 그는 집안에서, 나라 안에서 영화를 만들어 왔고 그 결과물에 힘입어 변함없는 세계적 거장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죠. 그런 그가 십수년 만에 자신은 카메라 뒤에 머무른 채 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그저 사고였을 뿐>은, 국가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과 그에 굴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애착으로 가득한 영화였습니다. 그 고단한 모든 여정이 있었기에 완성될 수 있었던 영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정비소에서 일하는 바히드(바히드 모바셰리)는 밤중 일터에 머무르던 중 갑작스런 손님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손님의 발걸음 소리에 그만 심장이 얼어붙고 맙니다. 삐걱 소리를 내며 느릿느릿 걸어오는 의족. 바히드는 그 한밤의 손님이 과거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이끌었던 '외다리 에크발'(에브라힘 아지지)임을 직감합니다. 그가 떠날 때까지 숨죽여 있다가 그가 정비소를 나서자마자 뒤쫓아가서는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바히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납치합니다. 그 길로 모래밭에 도착해 납치한 이를 묻으려는데, 그는 바히드에게 자신은 에크발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바히드 역시 에크발로부터 고통받았던 그 시절 내내 눈을 가리고 있어야만 했기에, 얼굴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혼란에 휩싸입니다. 바히드는 납치한 남자를 다시 승합차에 싣고는 그의 얼굴을 알 법한, 즉 자신과 마찬가지로 에크발로부터 고초를 겪었을 사람들을 수소문해가며 그가 정말 자신이 아는 '외다리 에크발'인지 알아내고자 합니다. 그 남자는 과연 에크발이 맞을까요. 정말 에크발이 맞다면, 바히드는 그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저 사고였을 뿐>(It Was Just an Accident, 2025)


<그저 사고였을 뿐>은 에크발을 차에 실은 바히드에서 출발해 일행이 추가되고 여정이 이어지는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을 빌리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한창 반향을 일으키던 20~30년 전 이란 영화의 형식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 형식의 특색이 한 개인의 여정을 통해 이란 사회를 두루 들여다 본다는 점이었는데, 이 영화 역시 그런 특색을 지니고 있는 것이죠. 바히드와 그 일행들로 하여금 '외다리 에크발'에 대한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건 분명 과거의 기억이지만, 그 과거가 어떤 것인지 영화는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스치듯 드러낼 뿐 소상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과거의 디테일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히드를 비롯해 그가 여정 중에 만나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끔찍한 고초를 겪었다면 그 이유가 대략 어떤 것이었는지는 유추가 가능할 것입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그들의 이런저런 활동이 국가 체제에 반하는 행위로 판단되어 그들을 그 악명 높은 '외다리 에크발'에게로 이끌었겠죠. 그런 그들의 과거는 마치 신기루가 된 것처럼, 현재의 이란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 이란의 현재는 안정을 되찾은 것일까요? 그 평화로운 현재가 국가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수년간 끔찍한 학대를 가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가장 빛났어야 할 시간을 앗아간 국가는 뒷짐을 진 채 모습을 감추었고, 그 충실한 부역자들은 평범한 시민의 얼굴 뒤로 숨어들고는 그때를 '한 시절'로 치부한 채 살아간 결과 만들어진 것이라면.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진 이란의 평화로운 현재에 대해, 살아남은 이들의 내적 사투를 보여주며 단호히 반기를 듭니다.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이들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트라우마는 그들의 표정을 완전히 뒤바뀌어 버립니다. 공포에 떨게 하거나, 원한에 사무치게 하거나, 분노에 타오르게 하면서 말이죠. 그들이 현재 영위하고 있는 일상은 지났다고 생각했던 그날의 상처가 소환하는 끝없는 비명에 웅크린 채 살아가는 필사적이 노력 끝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영화가 복수극이었더라면 인물들의 이러한 내적 사투는 분노의 폭력적 표출과 함께 수포로 돌아갔을지 모르지만, 이 영화는 복수극이 아니고 인물들의 내적 사투는 끝까지 그치지 않습니다. 그 내적 사투는 이제 자신에게 고통을 안긴 주체와 마주했을 때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것으로 전환됩니다. 그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고통을 줄 것인가, 그가 나에게 악이고 공포였듯 이제는 내가 그에게 악이자 공포가 될 것인가. 그러나 힘겹게 삶을 되찾은 그들은 과거로 인해 피폐해지지 않고 다시 인간다움을 회복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지옥에서 살아서 나왔다는 이유로 자신까지 악마가 되지는 않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인간다움을 앗아간 폭력에 맞서서,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저 사고였을 뿐>(It Was Just an Accident, 2025)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스스로 현실에서 그러한 수난을 겪어와서인지, 직접 겪어야만 곁들일 수 있는 자조 섞인 웃음을 더해 이야기를 그립니다. 그래서 간혹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비극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집니다. 그 웃음은 이야기를 가볍게 만들기는커녕 그 수난을 기억하려는 노력을 들일 필요도 없이 그만 몸에 새기고 만 인간들의 비극을 더 선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물들이 차를 타고 누비는 곳곳에서 마치 평화로운 사회의 일부분인 양 당연하게 존재하는 부조리를 목격하게 됩니다. 경찰에 의해 무엇이 적발당하자 그걸 무마하는 명목으로 경찰이 마치 과태료 청구하듯이 뇌물을 '청구'한다거나, 병원에서 출산 기념 선물이나 팁을 병원비의 일부인 양 요구하는 의료진들의 모습이 그 예입니다. 이런 웃기지도 않은 세상 속에서, 처음엔 소란스런 소동극 같았던 이야기는 결국 고통을 흉터처럼 숨긴 채 살아오며 외면하려 했던 과거의 심연을 끝끝내 들여다보고 마는, 그리고 자신만은 그 심연 속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절박하게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내적 투쟁기가 되어갑니다.


이 영화를 보셨다면 제목이 언급되는 첫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잊기 어려울 것입니다. 시대가 인간에게 가한 폭력은 '그저 사고'처럼 치부되지만 인간은 끝까지 인간이겠다는 각오로 존엄하게 과거의 폭력 앞에 맞서고, 그 비열한 과거의 폭력은 시간을 건너 인간의 뒷덜미를 끊임없이 노리지만 인간은 거기에 휘말려들지 않고 존엄을 지킵니다. 마치 첫 장면과 절묘하게 조응하는 듯도 한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영화는 내내 먼 나라 남 이야기처럼 관찰자 시점을 취하던 관객을 난데없이 잡아끌고는 여느 나라 여느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기어이 옭아매고 맙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이란 사람으로서 본인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겠지만, 영화는 다만 이란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에 국한하지 않고 국가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을 폭력의 트라우마와 그 지난한 극복의 과정을 돌이켜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탄압당할수록 영화와 인간을 향한 애정은 더 커져만 갔을 감독은, <그저 사고였을 뿐>을 원한 맺힌 복수극이 아닌 내면적으로 더 치열한 투쟁극으로 만들어냄으로써 기어코 시대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을, 인간다움을 지켜내고야 맙니다.


<그저 사고였을 뿐>(It Was Just an Accident,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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