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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다짐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세계의 주인>

by 김진만
<세계의 주인>(The World of Love, 2025)


<우리들>, <우리집>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이 6년만의 신작 영화 <세계의 주인>을 들고 돌아왔습니. 여성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어른만큼 복잡한 그들의 내면과 그 성장을 디테일하게 짚으며 '윤가은 월드'를 구축한 감독의 이번 새 영화는 이제 여성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어른에 더 가까워진 만큼 더 무겁고 어두운 세계를 탐색할 수 밖에 없지만, 여전히 윤가은 감독이 그리는 주인공은 힘차게 그 탐색의 에너지를 자랑하고 그 덕에 그 어느 때보다 어른 관객들의 마음에 커다랗게 내려앉습니다. 통렬하지만 섬세한 손길과 다정한 마음을 지닌 이 영화는 윤가은 감독이 비로소 한국영화의 젊은 거장으로 자리매김함을 보여줍니다. 생각보다 큰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정보만 접하고 영화를 보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만, 중요한 정보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이 영화의 훌륭함을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주인이(서수빈)는 한창 진로를 정하라는 압박에 시달릴 만한 고등학생이지만, 여전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것저것 있는대로 해봅니다. 남자친구 찬우(김예창)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연애도 치열하게 해보고, 태권도장에서 수련도 열심히 해보고, 까마득하지만 친한 언니들과 봉사활동도 하고, 마술에 심취한 동생 해인이(이재희)를 적당히 잡도리해가면서 집안일도 거들어 봅니다. 붙임성 좋으면서도 속에 없는 말은 못하는 주인이는 어느 누구와도 두루 어울리는 '인싸' 같으면서도, 관심이 필요해서 저런가 싶을 만큼 뾰족한 캐릭터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어느날 같은 반 친구 수호(김정식)의 제안으로 학교 주변의 어떤 이슈에 관해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서명 운동이 진행되는데, 이때도 주인이는 자기 나름의 확고한 이유를 들어 서명 운동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며 기를 쓰고 참여를 거부합니다. 수호와의 언쟁이 격해진 끝에 격앙된 주인이는 뜻밖의 한마디를 질러버리고, 교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해집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주인이를 추궁하는 의문의 쪽지가 전해지는데, 그 쪽지 안에는 그동안 힘겹게 가다듬어 온 주인이의 세계를 흔들 만한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인싸, 관종, 허풍쟁이, 거짓말쟁이... 과연 주인이는 진짜 어떤 사람일까요.


<세계의 주인>(The World of Love, 2025)


윤가은 감독의 전작인 <우리들>과 <우리집>은 '어린이들에 관한 영화'였지만 '어린이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화에서 어린이들은 늘 피부양자가 아니라 저마다의 세계에서 저마다의 투쟁을 벌이는 독립된 인격체였고, 그 세계와 투쟁은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성숙한 존재라고 해서 세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세계가 전부라고 믿기에 투쟁은 더 절실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투쟁은 우리 모두가 겪어온 것이기에 결코 만만하지 않은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임을 알게 해준 영화들이었죠. 그런 아이들이 자라나 청소년이 되듯, 윤가은 감독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를 누볐던 전작들에서 나아가 이번 <세계의 주인>에 이르러 청소년들 사이를 누비며 함께 성장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영화가 성장했다기보다 주인공들이 자라나며 비로소 그때 해야 할 이야기들을 꺼내들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성과 사랑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줍니다. 이건 무슨 반항아들의 일탈도 아니고 육체적-정신적으로 성장하면서 싹트게 되는 자연스럽고도 건강한 관심의 표현입니다. 더불어 '진로'라는 명분으로 삶의 다음 단계를 선택하는 장에 끊임없이 던져져야 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후에는 더 이상 없을, 선생님같은 어른들과 이제 어른이 되어 뭘 할 것인지 공식적으로 이야기 나눠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한 것이죠. 더 이상 친구들과 어울리고 공부 열심히 하는 현재에만 머물 수 없기에, 그런 그들이 당면한 고민은 어른의 그것과 가장 가깝게 무겁고 어둡고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한 자아 정체감으로 자기 세계의 주인이고픈 마음이 어느 때보다 강한 그들은 그런 고민을 끌어안고도 힘든 내색을 쉬이 보일 수 없다고, 아니 보이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래 아이들처럼 역시 자기 '세계의 주인'이고 싶은 주인이가 마주한 과제도 이와 상통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보다 더 크고 짙은 것만 같은 나의 상처가 있다면, 그 상처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렇지 않음을 아득바득 주장해야 할까, 아니면 사방을 둘러보며 아프다고 엉엉 울어야 할까. 한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를 아이들에게 투영시키며 어른들을 통렬하게 만들었던 윤가은 감독은 예의 그 예리하고도 세심한 접근으로, 좀처럼 쉽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그 어떤 창작물보다도 자연스럽고도 분명하게 꺼내어 듭니다. 그런 감독의 접근이 좋은 점은 아이들의 세계를 존중하고, 그 존중하는 마음으로 설령 불편할지라도 아이들의 부단한 투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그렇게 스스로 깨닫고 성장하는 아이들에 대한 더없는 애정을 표시한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 속 주인이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보는 우리까지 불편하게 만들곤 하는 주인이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우리는 감히 말을 얹을 수 없습니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 것'을 '괜찮은 것'으로 알고 있던 주인이가 부딪히고 고민하고 쏟아내고 걸어가는 모습에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안고 세상을 마주했을 때 우리 또한 겪어야 했던 내적 투쟁을 떠올리게 될 뿐입니다. 그 투쟁은 치열할 수 밖에 없지만 다행인 것은 나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게 하는,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세상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세상이 끝내 우리를 다정하게 보듬기에, 우리는 우리를 굴복시키려는 상처들 앞에서 나다움을 지키며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이어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계의 주인>(The World of Love, 2025)


'윤가은 월드'의 주인공들은 이번에도 현실 어딘가에서 우리와 함꼐 살아숨쉬고 있을 듯 생생합니다. 타이틀롤인 주인 역을 맡은 서수빈 배우는 (극중 역할은 미성년이지만) 감독의 영화 중 성인 배우로는 처음 주인공으로 나선 사례일 듯 한데, 이번 영화가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면장면을 사로잡는 에너지가 가득합니다. 감독의 영화에는 틀리지 않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심리가 드러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위태롭게 하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 미세한 긴장감을 활기 가득한 표현으로 드러내다 마침내 쏟아지는 감정으로 관객을 함락시키기까지의 힘이 대단합니다. 그가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하게 감정을 쏟아내는 어떤 장면은 올해 한국영화에서 본 최고의 장면으로 꼽아도 손색 없을 것입니다. 한편 감독과 이번 영화까지 내리 세 작품을 함께 해 온 장혜진 배우는 이번에도 주인이의 엄마이자 어린이집 원장인 태선을 연기하며 극의 중심을 따뜻하게 잡아줍니다. 주인이와 세계를 잇는 또 다른 창구 중 하나로서, 지울 수 없는 상처 앞에서 함께 싸우는 엄마의 모습은 조용한 감동을 안깁니다. 이외에도 주인이와 끊임없이 갈등 혹은 소통의 축을 형성하는 수호 역의 김정식 배우, 주인이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사이인 유라 역의 강채윤 배우, 깨발랄하지만 의젓하고 기특한 동생 해인이 역의 이재희 배우, 주인이와 풋풋한 사랑의 시간을 나누는 남자친구 찬우 역의 김예창 배우 등 신선한 얼굴의 청년 및 어린이 배우들의 싱그러운 생기가 영화를 기분좋게 가득 채웁니다.


참 별난 아이다 싶게 바라보게 되던 주인이가 결국에는 보란듯이 잘 살게 되기를 응원하게 되는 과정은 무척 가슴 벅찬 경험입니다. 그 응원이 비단 주인이만을 향하게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령 아픔이 마술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을지언정, 세상을 향한 나의 사랑과 나를 향한 세상의 사랑이 있는 한 나는 세상 뒤로 사라지지 않고 세상 앞으로 살아갈 것임을 다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상처를 안고도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세상을 탐색하는 주인이의 세계를 제시하며, 윤가은 감독은 이번에도 아이들의 세계에서 누구나의 세계를 목격하게 하고 그렇게 너나할 것 없이 모두의 마음에 공명하기에 이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반추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세계의 주인>은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되는 우리의 내일을 질문하는 '윤가은 월드'의 또 한 걸음을 보여줍니다. 올해 최고의 한국영화로 주저없이 이 영화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의 주인>(The World of Love,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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