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덴의 영화읽기 30] <패터슨>
시(詩)는 자간과 행간의 여백이 말을 하는 문학이다. 글자 수는 적지만 울림은 크다. 인디영화의 기수인 짐 자무쉬가 한 편의 시와 같은 영화 <패터슨>을 내놓았다. 영화의 주인공도 시를 쓰는 버스 기사다. 대단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잔잔하고 고요한 여백이 관객들에게 진하게 스며들어온다.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
미국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 패터슨에 사는 버스 기사는 오늘 아침도 일찍 일어난다. 스마트폰 없이 살지만 언제나 출근은 제 시간에 한다. 공교롭게 그의 이름도 패터슨이다. 그의 일상은 특별할 게 없다. 이른 아침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버스 모는 데 쓰고 퇴근하면 저녁식사는 항상 집에서 아내와 함께 한다. 식사 후에는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단골 술집에서 늘 같은 맥주를 마시며 주인장과 한담을 나눈다. 그런 그에게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면 시를 쓴다는 것이다. 패터슨에 사는 시인 버스 기사 패터슨. 그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시를 되뇌며 출근한다.
짐 자무쉬와 아담 드라이버의 만남
1983년 세 편의 단편 영화를 엮어 만든 장편 <천국보다 낯선>으로 칸 영화제 신인상과 전미 영화 비평가 협회 최고 영화를 수상하며 혜성같이 등장한 짐 자무쉬. 그도 어느 덧 환갑의 나이가 넘었지만 아직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처음 그 때처럼 반짝인다. <다운 바이 로>, <커피와 담배>, <데드맨>, <브로큰 플라워>,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등 짐 자무쉬의 대표작들을 떠올려보면 그의 영화는 내러티브나 구성보다는 캐릭터와 분위기에 힘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패터슨>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는 특별한 사건을 발생시켜서 이야기에 힘을 준다기보다 오히려 서사를 배제하고 여백을 늘어놓는다. 서두에서 이번 영화를 한 편의 시와 같다고 표현한 이유도 그런 맥락이다.
짐 자무쉬가 밝히길 원래 <패터슨>은 20여 년 전부터 계획된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20여 년이 지나서 서랍에 묵혀뒀던 작품을 다시 꺼내들었고 그는 패터슨 역할을 맡아줄 누군가를 찾아야만 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 가장 상한가를 달리는 배우인 아담 드라이버가 그 주인공이었다. 아담 드라이버는 현재 박스 오피스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서도 악당 카일로 렌 역할을 맡으며 활약했다. 노아 바움벡 감독의 <프란시스 하>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소더버그 등 거장 감독에게도 부름을 받은 아담 드라이버가 이번에는 또 다른 거장 짐 자무쉬를 만난 것이다. 흥미롭게도 패터슨에 사는 시 쓰는 버스 기사(Driver) 패터슨 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이 아담 드라이버(Driver)다. 20여 년 전에 이미 구상이 다 짜여져 있었다고 하니 우연의 일치로 봐야겠다.
<패터슨>에는 아담 드라이버 말고도 이란을 대표하는 배우 골쉬프테 파라하니가 패터슨의 아내 로라 역할을 맡으며 등장한다. 남편 패터슨을 너무도 사랑하지만 매사가 똑같은 패터슨과 달리 로라는 항상 새로운 꿈을 꾼다. 진취적이고 변화를 즐기는 역할을 맡으며 패터슨과는 대조되는 캐릭터로서 작품의 내구성을 높인다. 또 한 명의, 아니 또 한 마리의 배우인 애완견 마빈의 씬스틸러로서 활약도 대단하다.
일상이라는 예술
패터슨은 영화 속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시를 쓴다. 그럴 때마다 항상 직장 동료, 아내가 말을 걸어 창작활동에는 잠시 제동이 걸린다. 늘 반복되는 하루처럼 그러한 제동의 순간도 매일 반복된다. 영화에서 아내 로라는 집안을, 자신의 옷을, 음식을 모두 동그란 원 모양으로 꾸미고 만들어낸다. 로라는 반복해서 원을 복제한다. 직장 동료는 반복해서 자신에게 생긴 일을 털어놓는다. 한 시인의 창작과정은 계속되는 반복과 복제에 의해 제동된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 벌어지는 한 사건으로 시인은 반복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패터슨>은 그냥 평온한 이야기예요. 인생이 항상 드라마틱한 건 아니니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대한 영화죠. 폭력이나 분쟁 같은 건 나오지 않아요. 다른 종류의 영화도 필요하니까. 내 영화들에서 내가 바라는 건, 플롯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거죠. 그냥 순간순간마다 그 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라요.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중략) 분명히 얘기할 수 있는 건, 이 영화가 무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에요. 패터슨은 버스 운전사이지만 시인이 되는 것을 선택하죠. 로라는 계속 새로운 꿈을 꾸고요. 자신의 길을 선택할 기회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고 행복이에요.”
짐 자무쉬가 인터뷰에서 직접 영화에 대해 밝힌 소회다. 대단한 일은 벌어지지 않지만 소소한 일들이 쳇바퀴 굴러가듯 반복되는 우리네의 일상과 크게 다름없는 패터슨의 삶을 보면서 일상의 위대함과 희망을 느낄 수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 잔잔하고 고요하면서도 울림이 큰 <패터슨>으로 각자의 일상을 어루만져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