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하면서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힘드시지요? “ 그러면 대개 고개를 끄덕입니다. 고향이 경상도인 사람들은 ’ 힘들다 ‘는 표현을 이렇게 합니다. “내 힘들다” 경상도 말투가 다소 압축적이라 이 말은 “나 정말 너무 힘들다”라고 해석하시면 됩니다. 이 “내 힘들다”라는 단어를 화이트보드에 쓰고 삼창을 합니다.
“내 힘들다”
“내 힘들다”
“내 힘들다”
이런 다음 참석자 중 한 사람을 골라 “내 힘들다”라는 말을 거꾸로 읽어 보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다들 힘내!”라고 말합니다. 더러는 웃고 더러는 멍하고 있게 됩니다. 세상을 보는 패러다임과 프레임을 바꿔주는 작업입니다. 제가 하는 강의는 대개 이런 식입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관점을 바꾸자는 내용입니다.
언젠가 한 참가자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영업도 잘 안 되고 참 그러네요.” 이런 말을 툭 던지면서 그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사방이 다 막힌 것 같아 숨조차 쉬기가 힘들어요.” 언뜻 듣기에는 푸념 같았지만 제 형편을 다 아는 같아 가슴이 철렁거렸습니다. 그 참가자만 힘든 것이 아니라 저 역시 무척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날 그분에게 이런 처방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김 차장님! 사방이 다 막히면 위를 보시면 됩니다. 그곳을 보시면 뻥 뚫려 있습니다.” 여기서 위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내심 “하나님을 보시고 그분을 붙잡으세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초면인지라 신앙이야기를 하기가 그랬습니다.
저는 늘 후배나 지인들이 힘들다고 하면 앞서 소개한 것처럼 “내 힘들다”를 “다들 힘내!”로 바꾸는 생각 체조(?)를 함께 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사방이 막힐 땐 위를 보라고 처방전을 내려줍니다. 이렇게 하면서 작은 전도를 위한 몸짓 발짓을 하는 셈이지요.
새벽기도를 마치고 자리를 뜰 때 전 설교 단상 위에 있는 <십자가>를 한 1분 정도 응시합니다. 교회 본당이 실내이니까 사방이 막혀 있지만 십자가를 위로 생각하고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맘이 잠시나마 차분해지고 마치 하나님께서 저를 보시는 듯한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눈도장 찍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오늘도 출석했습니다. 오늘도 잘 지켜주세요?” 그리고 자리를 뜨면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집니다.
저는 하늘을 잘 안 보고 바닥을 보면서 걷는 습관이 있습니다. 직업상 뭔가 곰곰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 모습을 보고 아내는 말합니다. “여보! 좀 고개를 들고 거만하게 걸어봐! 땅에서 뭣을 찾으려고 늘 그래!” 이런 핀잔에도 태생이 굴신인 저는 고개를 잘 못 들고 다닙니다. 그러나 요즘은 좀 달라졌습니다. 자꾸 위를 바라봅니다. 제 마음에 그린 하늘에서 하나님을 응시를 하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사는 게 고역일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 건강 문제, 관계 문제 등등 문제투성일 것입니다. 아마 이런 게 인생이라고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투성이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답은 문제를 보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문제점을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현상’이고 문제점은 ‘원인’입니다. 그런데 문제점을 본다고 해결이 될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냥 맡기면 됩니다. 하나님께 이실직고하고 맡기면 됩니다. 그러자면 사방을 보지 말고 위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저는 위를 보고 그분에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못난 놈, 문제투성이인 이 바보 같은 놈 살려주세요. 죄송하고 송구합니다. 살려 주세요”
지금 사방이 막혀 있나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시면 됩니다.
성경말씀 ☞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니
(시편 1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