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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 Dec 23. 2022

지난 여름 기록

뜨겁고 서글펐던 8월


여느 날과 다름없는 8월의 아침이었다.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잠깐 씻으러 간 사이, 아빠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두 통이 와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 아침을 먹은 적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는 가끔씩 아침을 거르지 말라며 전화를 했고, 비가 온다고 되어 있는 날에 아빠는 우산을 잊지 말라며 종종 전화를 하곤 했다. 왜 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이런 사소한 부분조차도 아직 확신을 주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을까, 생각하면서 통화를 눌렀는데, 돌아오는 뜻밖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빠는 오전 중에는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다며 오빠의 퇴근시간에 맞춰서 같이 차를 타고 오라고 했다. 회사에는 소식을 전한 후라 저녁까지 잠깐의 공백이 생긴 나는, 죽음이란 뭘까 잠깐 생각했다. 성인이 되고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마주본 건 처음이었다. 작년 쯤부터 할아버지는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셨다. 가끔 외가에 들리더라도 할아버지는 금방 방으로 들어가 누워 계셨는데, 그래도 올해 설 때는 몸이 조금 괜찮으셨는지 같이 윷놀이도 하고 밥도 같이 먹었다. 그게 마지막일 줄도 모르고.


깜깜해져서야 도착한 장례식장에는 다행히 이미 많은 분들로 붐비고 있었다. 명절에도 만나기 힘든 외가 친척들은 이미 조의복을 입고 문상객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건 오랜만이라 모순적으로 가족 모임 같기도 했다. 생각보다 엄마의 얼굴이 어둡지 않아 다행이었다. 영정사진은 언제 찍어두신 걸까. 액자 속에 크게 자리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손녀 왔어요, 할아버지. 당신의 앞에 서있는 손녀는 무뚝뚝하고 낯가림이 심해 실제로는 곰살맞은 인사를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향년 86세. 할아버지께 절을 올리고 밥을 먹는 나를 보며 아빠가 “아빠는 할아버지 나이까지 살 수 있을까?” 갑자기 물어왔다. 아빠가 마흔이 될 무렵 태어난 나는 다르게 말하면 아빠와 함께할 시간이 가장 적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3일. 외가 가족들과 이렇게 친밀하게, 오래 함께였던 적이 있을까 생각했다. 새벽이 되어서는 장례식장 한 켠에 각자 자리를 잡아 밤을 샜다. 씻지도 않고 불편하게 밤을 보내고 있는 우리를, 할아버지는 저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또 세상에서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을 잃었구나. 누군가 곁에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동시에 외로워졌다. 


할아버지의 발인날, 할아버지는 그렇게 아끼던 손자의 손 위에서 평생을 보냈던 공간을 누볐다. 할아버지의 옷과 숟가락과 사진은 남아있지만, 세 사람이 살던 집에는 이제 두 사람만 있을 것이다. 키가 크고 건장했던 내 기억 속 할아버지는 창 하나를 두고 하얀 재가 되었다. 이제 할아버지는 어디에도 없지만, 반대로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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