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시절 그추억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여중 여고를 졸업하고 후기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것이 1993년이었다. 그러니깐 나는 소위 93학번이다. 대학 입학 전까진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소녀였었다고 추억하고 있다. 학교, 집, 학원 외엔 갈 곳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기껏 친구들이랑 일탈을 했다는 게, 저녁식사시간에 학교를 몰래 빠져나가 근처 시장에서 떡볶이를 사 먹었던 정도였다. 그러니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겠는가?
재수를 시켜달라고 몸부림을 쳤건만 아버지는 꿈쩍도 안 하셨다. 그냥 떠밀려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대학이라는 곳이 참 희한한 시절의 학교였다. 우리 선배들은 수도 없이 대모를 일삼았고, 앉으면 소주 파티였고, 뭘 안다고 정치 얘기로 꽃을 피웠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딱 우리 학번에서는 대모 문화도 사라지고 그야말로 태평성대 시절의 놀고먹자 대학생이었다. 특히나 상경대쪽은 남학생이 우글우글한 동네였다. 지금은 성비가 어찌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남학생이 월등히 많은 계열이었다.
경제학과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다 더해도 학생 수는 160여 명, 그중 여학생은 18명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꽃다운 대접을 받았을지 상상이 되는가? 그럼에도 대접은 대접이었고, 어울림에 있어서 여자라고 봐주는 건 없었다. 입학 전 OT 때부터, 강의 첫날 전체 모임, 연달아 있었던 봄 MT, 대학의 호시절 봄 축제까지 입학하자마자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놀고 마시고 취해서 비틀거릴 때였다. 술이라는 것을 대학에 가고서야 접해보았다. 처음 마셔본 술은 역시 소주다. 후라이드 치킨 집에서 후라이드 한 마리에 소주는 기본 10병은 시키고 시작하는 선배들로부터 첫 잔을 배웠다. 원래 술은 아버지에게서 배우는 것이라 들었는데 나는 대학 선배에게서 술을 배웠다. 얼마나 잘 배웠을지 알겠는가? 치킨 안주는 아주 고급 안주였다. 주로 새우깡에 깡소주. 우린 어디서든 앉으면 마실 수 있는 나이들이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학교 앞 소줏집에서, 광안리 바닷가에서, 남포동 극장가 앞에서, 서면 지하도에서, 전포동 나이트클럽 앞에서도 마셨던 걸로 기억이 된다. 또 그때는 그렇게 술을 마셔도 크게 부끄러운 건지도 몰랐던 나이였다.
대학 1학년 봄 MT, 남해 상주 해수욕장 바닷가 민박집.
바닷가로 MT를 간 우리였지만, 거의 민박집을 벗어나질 못했다. 찌그러진 커다란 양푼이에 막걸리와 사이다를 붓고 사발로 떠 마셔가며 우린 웃고 떠들었다. 여학생을 위한 방은 따로 준비되지 않았다. 그저 섞여서 그냥 어울려 자는 건 줄 알았다. 한쪽에선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고, 다른 쪽에서 고스톱 판이 벌어졌다. 지금은 술이 많이 약해졌지만, 아무튼 그때는 아주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나는 곯아떨어진 쪽이 아니라 고스톱 판에 낀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고스톱의 벌칙도 술 마시기였으니 우리가 얼마나 고주망태가 됐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럼에도 그 시절이 즐거웠다. MT 내내 새우잠을 자면서도 지치지 않았고 팔딱팔딱 살아 날뛰는 활어 같은 날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술독에 빠져 대책 없는 젊은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다음날이면 멀쩡하게 살아났으니 젊음은 젊음이었다.
대학의 꽃은 축제였다. 우리 학교는 봄에 축제를 개최했다. 할머니 간병 때문에 1학년 2학기를 휴학하고 2학년 올라가면서 다시 복학을 했다. 그해 봄 축제에서 우리 과는 주점을 열었다. 여학생이 몇 명 안되었기에 거의 매일 번갈아가며 음식을 담당해야 했다. 주로 파전이나 오징어무침이었지만 손이 여간 많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주점으로 바빴던 우리는 축제 마지막 날 뒤늦은 저녁에서야 술판을 벌일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고 뒤늦게 맛본 막걸리가 그렇게 맛있는 술일 줄이야~~
주는 대로 다 받았다. 미친 거지... 한 번도 취해서 필름이 끊기거나 실수를 한 적이 없었으므로 괜찮을 줄 알았다. 얼마나 마셨는지 모를 그쯤에 화장실에 가야만 했다. 옆에서 괜찮냐며 같이 가줄까 하는 말에 큰소리 뻥뻥 치며 괜찮다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까지 꾸벅하고 화장실에 간 나는 술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화장실에 들어간 후론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필름이 끊기는 경험을 했다. 2학년 때 나는 한 학년 선배와 자취를 시작했었다. 자취방은 학교 후문에서 걸어서 5분 거리도 되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늦게서야 잠이 깬 나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자취방인데 기억이 없다. 어떻게 집엘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부스스 꾸물거리고 있었더니 선배 왈, "기억은 나나? 어제 니 경영학과 남학생한테 업혀왔데. 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니 밥 좀 사줘야할끼다." 젠장 얼굴도 모르는 남학생 등에 업혀 왔단다. 선배가 아는 후배에게 부탁해서 나를 업고 집에까지 델따주고 갔다는 것이다. 이런 제기랄, "선배 절대로 누군지 갈켜주지마세요." 그날 오후 대중 목욕탕에서 문 닫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아주 목욕탕에 빠져 죽고 싶은 날이었다. 그 후로 선배가 알려주려 하면 내빼기부터 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남학생이 누군지 나는 모른다.
맨날 술이야~ 맨날 술이야~
몇 명 되지 않는 여학생끼리 돈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중 유독 더 친하게 지낸 몇 명은 아주 술꾼들이었다. 술꾼대학여자들이었다. 우리끼리도 얼마나 재미있게 노는지 어딜 가든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었다. 하루는 기분이 꿀꿀하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한참 유행하던 로바다야키로 향했다. 우리가 대학생이었던 그때 학교 앞에 생긴 로바다야키 주점에선 레몬소주, 오이 소주, 체리 소주 같은 소주에 과일이나 야채를 넣어서 소주 맛을 좋게 했던 술이 유행이었다. 주전자에 소주를 붓고 레몬을 넣어서 마시기 좋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마셔야 취하는 줄 알 수가 없었다. 셋이서 레몬 소주 11주전자를 들이부었던 날이었다. 알딸딸하게 취한 우리의 2차는 뭐라 해도 노래방을 빼놓을 수 없었다. 로바다야키 근처 노래방에 들어간 우리는 정말 환장파튀도 그런 환장파튀가 아닐 수 없게 그렇게 미친 듯이 놀았다. 소파 위에 올라가 방방 거리던 우리 중 한 명이 "야들아 내 발이 어디 빠진 것 같데이" 하는데 아뿔싸 소파 가운데가 찢어져서 구멍이 나고 거기에 발이 빠진 것이었다. 우리는 술에 취했었다. 사장님께 사실대로 말하고 사과를 하고 어떤 조치를 취했어야 했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후다닥 도망치기 바빴다. 지금이야 CCTV가 많이 달렸있지만, 그 당시엔 그런 것은 입구 쪽에 하나쯤 있었을까? 하는 시대였다. 그러니 우리가 도망친다 해도 사장님이 우리를 잡아내기가 여간 어려울 때가 아니었다. 후다닥 도망친 우리는 멀리까지 뛰어가서야 미친 듯이 웃었다. 사장님껜 정말 죄송했지만, 우리에겐 기가 막힌 반전의 추억이 되었다. 그 뒤로 그 노래방에 다시 가진 않았다. 지은 죄가 있으니 피해 다녀야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것이다.
대학시절 맨날 술이야~를 외치며 어디서든 소주에 새우깡 한 봉지면 행복했던 젊은 청춘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딱 우리 학번이 선배 학번에도 후배 학번에도 없는 태평성대 대학시절을 보낸 때였던 것 같다. 후배들은 취업 준비 때문에 우리처럼 놀고 먹자 대학시절을 보내진 않았고, 선배들은 대모며 정치에 관여하느라 놀고 먹자 대학시절이 아니라 투쟁의 대학시절을 보냈다. 우리 학번이야말로 대모도 취업 준비도 그렇게 치열하지 않았던 때였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세상을 바라봤던 젊음의 시간이었다. 나름 멋진 시절이었다. 그때 함께 취해서 비틀거리며 세상을 바라보았던 우리 동기들은 지금 다들 어디서 뭘 하며 살고 있을까? 대학 동창들과 소식이 끊긴지 벌써 20년이다. 내 삶이 힘들어지면서 옛 동무들과의 연락을 다 끊었다. 그 동무들은 어떤 모습일지 가끔 생각해 본다. 찾으려 들면 요즘 같은 세상에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찾아서 뭐 하려고? 하는 생각이 앞선다. 하지만 이렇게 추억을 소환하는 날이면 가끔 그리워진다. 술에 찌들어 하루를 보냈던, 그 시절을 함께 한 동기들이 있어서 찬란했었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