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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향여행자 Dec 10. 2023

다시 쓰여진 달력

13년 만의 출근

13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여의도 환승센터에서 내렸다. 길을 건넜고, 여의도 공원을 걸었다. 점심때마다 식후 커피를 마시며 걷곤 했던 길이다.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방송국 건물. KBS를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많이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을 때의 두근거림이었다. 오르고 내리고 하던 계단도, 수없이 드나든 현관문도 그대로였으나, 로비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새로운 카페가 들어서 있었고, 낯선 공간들이 생겼다. 13년이나 흘렀는데 변한 게 당연하다.



13년 만의 출근이었다. 제작진이 아닌 출연진으로의 출근이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묘했다. 녹화 일로부터 일주일 전쯤의 일이다.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이동 중이라 전화를 받지 못했는데 그 사이 강다방 님의 문자 한 통이 함께 와 있었다. KBS <황금연못>이라는 프로그램의 작가님이 섭외 문의 연락이 왔다는 내용이었다. 말미에 적힌 작가님의 연락처와 부재중 전화번호가 일치했다. 그렇게 해서 작가님과 첫 통화를 나누었다. 사실 소집을 하고 초창기에 방송 섭외 전화가 많이 왔었다. 갑작스러운 연락들에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한 두 번은 응했다. 제대로 사전 정보를 찾아보지 않고 온 게 바로 티가 나기도 했고 대충대충 질문하고, 대충 찍고 가는 느낌에 적잖이 실망스럽기도 했다. 이런 것이 눈에 보이는 건 아무래도 예전에 일을 한 경험 때문일 거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기에 더 조심스럽기도 했다. 내가 하는 말의 책임감의 무게를 알기에 더 신중해야 했다. 이후로 전시를 하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송 외에는 고사했다. 굳이 아버지나 내가 도드라질 필요는 없었다.


이번에 연락이 닿은 작가님도 그런 섭외 연락을 했더라면 거절했을 것이다. 실은 <황금연못>이라는 프로그램도 낯설었기에 더더욱 경계심을 가졌다. 그런데 그 경계심이 작가님의 한 마디에 한 번에 허물어졌다. 할아버지의 달력 이야기였다. 작가님은 '달력' 아이템을 주제로 검색을 하다 내가 쓴 할아버지의 달력 이야기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2년 전 소집에서 연 할아버지의 1주기 전시에서 공개했던 할아버지의 달력은 할아버지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의 하루하루가 빼곡히 담겨 있는 일기장이었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더 애틋해진 할아버지의 손글씨. 그래서 유품을 정리할 때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께 부탁드려 간직하게 된 달력이다. 할아버지의 달력은 2021년 9월에 멈춰 있었지만, 계속해서 내 마음에서 쓰이고 있었음을 느끼게 해 준 전화였다. 출연을 결심한 이유다. 이후로 사전 전화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정말 꼼꼼하게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셨구나', '나에 대해 찾아보셨구나'를 느꼈다. 예전에 내가 어떤 일을 했고, 그 이전에 방송 일을 했다는 것까지 먼저 이야기를 꺼내시는 걸 보고 좀 놀라기도 했다. 얼마큼 이 일에 진심인지가 느껴졌다. 깊은 감동을 받았고 고마웠다.     


한편으론 막상 출연을 결심해 놓고 하루하루 부담감이 커지기도 했다. '그래도 언제 이렇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겠어.'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찾아온 녹화일 당일. 방송국에 도착했을 땐 한때 잠시 몸 담았던 일터였기에 낯설지 않은 곳이어서 긴장감이 조금 풀리기도 했다. 10시 40분쯤 도착해 약속 시간인 11시가 될 때까지 로비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던 내 모습이 느껴지기도 했고, 지금은 새로운 카페가 들어섰지만 사라진 옛 카페 모습이 어렴풋 떠오르기도 했다. 방송이 끝나고 나면 출연자들과 티타임을 가졌던 순간도 떠올랐다. 11시가 되었을 무렵, 통화를 나눈 장 작가님이 마중을 나왔다. 처음 만나는 거였지만 환하게 맞아주는 상냥함에 어색함이 금세 풀렸다. 사전 대본리딩 장소로 향하는 길에 방송 날마다 분주히 뛰어다녔던 구름다리를 오랜만에 건넜다. 생각보다 나는 '이곳을 참 많이 그리워했구나' 느끼는 순간이었다. 하나하나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정말 재밌었던 건, 사전 대본 리딩을 마치고 본관 식당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내가 잘 알 거라 생각해서 작가님이 따로 위치를 알려주지 않으셨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차마 모르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순간 살짝 당황했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본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순간순간 그곳에서의 추억이 살아났다.



12시 40분. 다시 녹화 장소로 향했다. 일을 했을 땐 생방송 프로그램만 했어서 녹화 방송은 낯설었다. 1시쯤 시작해 5시쯤 끝날 예정이라고 했다. 순서는 마지막 순서였지만 4시간을 내리 한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게 꽤나 힘들 것 같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토크쇼여서 그런지 한 분 한 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다 보니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출연진이 되고 보니 제작진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제작진들이 출연진을 바라보는 시선을 관찰하는 것 또한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러면서 '13년 전에 나도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싶어 애틋해지면서 뭔가 모르게 뭉클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3시간쯤 흘렀을 무렵. 내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순서가 되었다. 내 이야기가 소개되기 전 잠시 먼저 영상을 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화면에 나온 할아버지의 젊은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영상이 끝나고 바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고개를 들어 천장 쪽을 응시하며 나오려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목소리가 떨리고 손이 떨려서 한 손으로 잡아야 하는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으며 떨리는 마음을 누르려고 애썼다. 방청석에 와 계신 어르신들을 보니 할아버지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다. 어쩐지 할아버지가 저기 방청석에 앉아서 내 이야기를 듣고 계실 것만 같아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잘 전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MC분들과 패널 분들께서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할아버지의 달력을 세심히 봐주시는 마음이 느껴지며 다행히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장시간의 녹화가 끝났다. 녹화가 끝난 후. 기념 촬영을 해주시는데 여전히 눈시울이 뜨거운 가애란 아나운서가 '마지막 순서라 기다리느라 힘들었을 텐데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귀한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감사하다'는 다정한 말에 깊이 감동하기도 했다. 덕분에 녹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 꽤 포근했다. 다만, 나에게 이곳까지 올 수 있게 섭외 전화를 해준 작가님과 긴히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유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날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 아쉬움은 다음 만남에서 풀기로 기약한다.


녹화일 이후로도 작가님은 사이사이 연락을 주었다. 본격적으로 편집이 들어가는 시기여서 추가적으로 필요한 이미지를 요청했다. 그러면서 알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 앨범이 모두 실종됐다는 것을. 이사를 하면서 어디로 갔는지 통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예전에 휴대폰으로 찍어 놓았던 사진들을 전해야 했다. 세심히 써주시는 마음에 잘 찾아서 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스러웠다.


방송날이었던 12월 9일 아침 8시 30분. <달력을 넘기면>이라는 주제로 시작된 방송. 녹화 날이 추억이 되어 새록새록 그날이 떠오르며 재밌게 방송을 보았다. 그러다 내 순서가 되었을 때, 할아버지 사진과 함께 소개되는 영상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녹화 때 겨우 참았던 눈물을 이제야 쏟아낼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출연했더라면 정말 좋았을 시간, 그리고 함께 출연한 방송을 보면 정말 좋았을 아침이라는 생각에 방송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세심히 담아준 제작진 분들께 정말 깊이 감사하다.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있는 우리 가족에게도 정말 큰 선물이 되었다. 할아버지와 낮술을 하던 날도 2019년 12월이었는데, 4년이 흘러 방송에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한 날도 12월이다. 내겐 이맘때의 12월이 꽤 오래 각별할 것 같다. 할아버지가 아주 많이 보고 싶은 날이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할아버지의 2023년 11월 28일 달력 날짜엔 기은이와 방송국 다녀온 날, 12월 9일 날짜엔 기은이와 방송 출연한 날이라고 쓰셨겠지.


할아버지와 꿈에서라도 낮술을 하고 싶은 그런 날이다.




*방송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링크 공유드립니다. 50분 40초쯤부터 할아버지의 달력 이야기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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