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편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아리 Aug 26. 2021

달팽이집

사진을 시작했다.


그동안 잠들어 있던 버킷리스트를 보며,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덜컥 카메라를 사버린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은 미러리스 카메라였다. 그동안 사고 싶었던 카메라를 운 좋게(그리고 고생한 덕에) 손에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엔 스냅숏 모드로 꽃 사진, 풍경을 이리저리 찍고 다니다가 수동으로 조리개도 돌려보고 셔터스피드도 조절하며 손맛을 익혀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오래전 외할머니댁에서 가져온 투박한 필름 카메라가 눈에 밟혔다. 예전 엑시무스라는 토이 카메라로 바다를 찍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결과물은 24컷 중 5개가 전부였다. 그때는 어찌나 실망스러웠던지 구석에 멀리 치워놓다가 결국은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저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긴 했던 것 같은데 결과물은 없는 걸 보니 단 한 장도 건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왜 자꾸 눈에 밟혔던 걸까. 그래서 우선 가볍게 시작이나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중고 필름 카메라를 구매했다. 처음이니까 배우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찍고 다녔다.

예전에는 필름을 직접 현상해주는 곳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필름 사진 현상을 대행해주는 곳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여기서는 한 곳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처음 찍은 필름을 맡겼다. 그리고 며칠을 기다렸다.


도착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필름에 찍혀있는 사진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36장의 사진을 받아 볼 수 있었지만 문제는 초점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맺혀 흐리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참 아름다운 풍경이었는데 잘못 찍힌 파파라치 사진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운 좋게 몇 개는 건질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제 막 땅속에서 잠을 깨고 나온듯한 달팽이 사진이었다.


-너 그거 알아?

-뭔데?

-달팽이는 계속 자기 몸을 키우면서 달팽이집도 그게 맞게 자라난대.

-오 그럼 무한대로 커지는 거야?

-흠, 아마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다르겠지? 그런데 문제는..

-문제?

-달팽이 몸과 맞닿아있는 부분이 성장선인데 그게 깨지면 더 이상 자라지가 않는대.

-헉 아예 평생?

-응. 그런가 봐.

-그럼 쉽게 만지지도 못하겠네. 근데 달팽이갑자기 왜? 키우고 싶어?

-응. 왠지 귀여울 것 같아.


애완용 달팽이를 키워볼까 하고 알아보던 찰나에 나누었던 전 애인과의 대화. 시답지 않은 달팽이 얘기였지만 우리는 달팽이 얘기로 밤을 새웠다. 어떻게 성장하느냐에 따라 달팽이는 거대해질 수도 아주 작아질 수도 있다. 그의 일생이 얼마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자신을 다지면서도 자신의 집을 만드는 달팽이. 자신을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느리더라도 성장하는 일을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키우지 않았다. 나는 바빴고 달팽이를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워 분명 얼마 못가 죽게 될 것이 뻔해서였다.


여느 때처 어느 연인들처럼 서로를 탓하는 말들이 이리저리 화살처럼 오가던 날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전날의 대화가 길었던 탓인지 조금 피곤했고 이 상황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마무리할까?

-그래.


대화를 마무리하자는 말이 었지만 어쩐지 그의 눈이 슬퍼 보여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에 예전에 했던 달팽이 얘기가 생각났다. 달팽이처럼 천천히 오래도록 자랄 것 같던 연애는 끝이 났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의 성장선을 날카롭게 찔러댔던 탓이었을까.


새 필름을 꺼냈다.

필름이 살짝 나온 부분과 필름통이 마치 달팽이 같았다. 지이이잉-필름 감기는 소리가 끝나고 작은 화면에 1이라는 숫자가 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습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