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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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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리 Jul 02. 2021

습하다

숨을 들이쉬니 눅눅한 공기가 콧 속으로 들어와 폐를 가득 채운다. 이렇게 물기 많은 공기를 들이쉬고 있자니 비타민 담배가 생각이 났다.


A부터 E까지 다양한 색깔과 맛을 품고 있는 액체를 미세한 떨림으로 한 모금 삼켜내는 일이 한때는 건강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따로 종합비타민을 챙겨 먹지 않으니까.

그러다 뉴스를 보고 폐에 물이 찬다는 얘기를 들으니 비타민에 익사할지도 모른다는, 내 딴엔 오래 살고 싶어서, 두려움 때문에 그날로 모든 것들을 가져다 버렸다.


비는 내일 온다던데, 벌써부터 예행연습이라도 하는 듯이 지상에는 아주 작은 안개 같은 것이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눅진한 미련 같은 것들이 종아리에 팔꿈치에 자꾸만 들러붙는다. 털어내려고 해 봤자 손바닥의 뜨거움만 전달될 뿐. 더 이상의 무모한 행동들을 포기하고 계속 길을 걸어갔다.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 줄 알았으면 차를 타고 올 걸 그랬다.


땀인지 비인지 모를 것들이 머리 위로 내리는데 마침 눈앞에 편의점이 있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 잠시나마 꿉꿉함을 잊어본다. 그리고 돌아갈 길을 함께할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밖을 보니 도로가 손에 쥔 아이스크림보다도 조금 더 살짝 녹아있는 것도 같지만 단단히 마음을 먹고 한 발 내딛는다.


눈이 뿌얳다.

이게 웬 한 여름밤의 엄동설한 같은 일인가 싶었는데 편의점이 너무 추웠던 탓인지 안경에 습기가 찼다. 습기 속에서 습기가 차다니.

얼굴은 겨울인데 몸은 여름인 아이러니한 광경에 웃음이 나온다. 안경을 닦고 다시 길을 걸으니 조금 덜 닦인 탓인지 가는 길은 여전히 뿌옇다. 그렇게 다시 비인지 땀인지 미련인지 모를 것들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습한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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