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무실엔 샐러드팸이 있다.
90프로의 여성 멤버와 10프로의 남성멤버로 구성된 이 모임은 점심시간마다 샐러드를 먹는다. 체중감량, 식이섬유 섭취, 아니면 그냥 맛있어서, 제각기의 이유로 건강한 식생활을 추구하는 그 무리 중에서도 내가 제일 유별난데, 나는 샐러드에 드레싱을 뿌리지 않는다. 메뉴 선택지에 '드레싱 x'가 존재하지 않아도 주방 창구에 머리를 들이밀고 '소스 빼고 주세요!'를 외친다. 언제나, 어디서 뭘 먹어도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느끼고 싶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일단 담백하고 싱거운 맛을 좋아하는 타고난 취향 덕도 있다. 어느 정도냐면, 특히 짠맛을 싫어해서 제일 안 좋아하는 음식이 떡볶이다. (떡볶이를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어?!)
찐득한 소스가 범벅이 된 음식을 먹으면 기분마저 끈적해지고 자꾸 손을 닦고 싶고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 들어 찝찝하달까.. 찐득, 범벅, 끈적.. 이런 단어들이 주는 어감도 너무 별로잖아?
제일 살찌는 음식이 나트륨과 탄수화물 덩어리인 떡볶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진심으로 안도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제일 살찌는 음식이라니. 떡볶이가 아니라 민트 초코나 바닐라 마카롱이라고 했으면 정말 슬펐을 텐데.
그리고 또 다른 원인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이다.
장장 6권이나 되는 장편소설이 싱겁게 먹는 거랑 연관이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책의 한 부분이 식성을 담당하는 나의 뇌의 어떠한 부분에 엄청난 자극을 주었다.
많은 내용을 생략하고 대강 적자면, 죽어서 신이 될 수 있는 기나긴 실습 과정에 참여하게 된 여러 영혼들이 처음으로 식사를 한 것이 계란이었다. (이미 죽었기에 영혼이라고 설명했지만 책에서는 실체가 있는 사람의 형태로 묘사된다.)
한동안 식사를 잊고 살았던 사람들이 계란을 처음 딱 입에 넣었을 때, 그 계란의 맛에 대한 묘사가 어찌나 생생했던지. 책을 읽는 나조차도 소금 한 꼬집도 없이 계란의 진하고 농후한 맛 하나로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이 조금이라도 덜 재미있었다면 당장 부엌으로 나가 계란 한 판을 삶았을 거다. 그 순간, 재료 본연의 맛이 가진 매력을 오직 글귀로, 미각도 후각도 아닌 시각으로 깨달아버렸다. (역시 육체를 지배하는 것은 정신이 맞다.)
그 이후로는 드레싱을 거의 먹지 않았다. 샐러드를 먹을 때도, 나의 최애 음식인 하와이안 포케를 먹을 때도, 그리고 만두를 먹거나 부침개를 먹더라도 간장은 찍지 않았다. 고기를 먹을 때도, 회를 먹을 때도 일단은 재료 그대로의 맛을 느껴본다. 내가 그 신 후보생들 중에 하나라고 상상하면서. 이 식재료를 처음 맛보는 미지의 탐험가라고 상상하면서.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간을 하지 않은 식재료의 맛을 좋아하게 되었고 (하지만 디저트는 언제나 사랑한다. 달수록 좋다.) 누군가 요리할 때 옆에서 재료를 한 조각씩 슬쩍 빼먹는 만행을 즐기곤 한다.
요즘 주로 회사 앞에 새로 생긴 헬스인들을 위한 다이어트 푸드 전문점에 다닌다. 메뉴는 흑미 덮밥, 파스타 샐러드, 그냥 샐러드 딱 세 가지에 음료도 오로지 제로 슈가로만 파는 건강식 맛집인데, 메뉴 옵션에 '소스 없이'가 없어서 항상 사장님께 따로 소스를 빼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한 번은 야근을 하면서 드레싱을 뺀 파스타 샐러드를 포장하러 갔는데 친절하신 사장님께서 이제 나를 알아보시는지 카운터에 턱을 괴고 물었다.
"소스 빼면 무슨 맛으로 먹어요? 진짜 궁금해서."
순간 머릿속에 대여섯 가지의 대화 시뮬레이션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어떤 경우에도 베르나르 베르베르 이야기를 10초 내로 요약하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그냥 "치즈맛이요!"라고 재미도 없고 솔직하지도 않고 인상적이지도 않은, 무척이나 불충분한 대답을 하며 아쉽게 돌아섰다. 언젠가 조곤조곤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있기를!
여전히 내 그릇을 들여다보고 "컨셉 잘못 잡은 거 같은데?"라며 저게 맛있을 리 없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가끔 주문 누락으로 소스에 적셔진 샐러드 파스타를 먹으면 간만의 자극적인 맛에 짜릿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역시 제일 좋은 건 생생한 본연의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