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젊음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용감할 정도로 막살았다. 특히, 피곤했던 지난 수험 생활을 보상받으려는 듯 성인이 되고부터 수업을 듣거나 약속을 나가는 것 같이 꼭 해야 할 일정을 제외하고는 줄곧 누워 지냈다.
"너 그러다 욕창 생겨."
한심함이 섞인 엄마의 잔소리에도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팔팔한 20대 초반이었으니까. 오로지 건강함의 피크만 경험한 사람으로서 '너 그러다 건강에 문제 생겨'는 '가마할아범이 잡아간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람직한 행동을 유발하기 위해 괜히 겁주는 그런 말. 네네, 그러든지 말든지요. 그렇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손가락을 베여도 다음날이면 기적같이 새 살이 붙어있는 건강한 청년이니까요.
눕는 습관은 밥을 먹은 직후에도 한결같았다. 배고픔을 해결하면 비로소 나른함이 몰려오고 나른함이 몰려오니 가장 먼저 침대가 생각났다. 밥 먹고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은 게으른 나에게 극락 같은 생활이었다. 한 학년 위의 선배가 와식생활을 하는 내 얘기를 듣고는 걱정을 보탰다.
"밥 먹고 바로 자면 일어났을 때 입에서 그... 음식물 쓰레기 냄새나지 않아?"
"엥? 저는 안 그러는데요? 그냥 평소랑 똑같은데."
"그래? 그럼 넌 아직 괜찮은가 보다. 괜찮을 때 빨리 고쳐. 나중에 진짜 후회해."
엄마의 잔소리도 그저 흘러가는 마당에 선배의 충고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난 장난 아니게 건강하니까.
그렇게 5년쯤 살았을까. 20대 중반이 된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났더니 목이 따끔따끔했다. 처음엔 감기 기운인가 보다 싶었는데 그 감기 기운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더니 나중에는 일관성 있게 목구멍이 아픈 게 아닌가. 마치 토한 직후의 쓰라림과 같은 약산성의 느낌이었다. 냄새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입안이 상쾌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묘하게 방금 토한 것 같은 느낌이 추가되어 있었다. 불현듯 선배의 충고가 떠올랐다. 선배는 이걸 음식물 쓰레기라고 표현했던 거구나.
역류성 식도염. 나의 진단명이었다.
예전에는 조였다 풀었다 하는 식도의 괄약근 같은 기능에 노화가 와서 생기는 노인 질환이었다지만, 요즘은 스마트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들 역류성 식도염에 걸린다고 한다. 티브이와 컴퓨터가 유일한 콘텐츠 소비 수단이었을 땐 소파든 의자든 어쩔 수 없이 앉아 있어야 했지만, 휴대폰이 컴퓨터가 된 이후에는 그 어떤 나태한 자세로도 콘텐츠 소비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이 기술 문명의 어두운 면인가,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나만 한심할 정도로 게으른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다들 이러고 사는구나.
일주일치 약봉투를 건네며 약사님이 리드미컬한 잔소리를 얹었다.
"맵고짠거 / 녹차커피 / 술담배 / 느끼하고 탄수화물 / 스파게티 피자 / 햄버거 빵 / 라면 삼겹살 / 이런 거 드시지 마시고요."
"그럼 뭘 먹고 사나요?"
"아직 덜 아픈가 보다."
매일 아침 식도의 불쾌함을 느끼게 되니 그제서야 건강에 대한 위기감이 찾아왔다. 사실 건강보다도 건강한 생활에 대한 위기감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로맨틱한 아침은 오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가장 사랑하고 사랑 얘기가 제일 흥미롭고 사랑에 가장 의지하며 사는 나는 모닝 키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모닝 키스란 무엇인가. 바스락거리는 흰색 코튼 이불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휴일 아침,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어 눈이 마주친 연인과의 로맨틱한 아침 인사.
그런데 누구든지 아침에 일어나면 부스스한 머리칼에 유분으로 번들거리는 피부가 되지 않는가.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키스를 불러오는 모습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럼 모닝키스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뿐인 걸까. 그렇지만, 어느 날 우연한 아침에, 지성이던 두피가 그날따라 기름을 적게 배출하고 입안이 적절하게 촉촉한 날이 올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아침에도 적당히 뽀송하고 입안이 상쾌한 하루가, 모닝 키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모닝 뽀뽀는 가능한 날들이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역류성 식도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지. 앞으로 나에게 로맨틱한 아침이란 없겠구나. 이미 지쳐버린 식도가 기적같이 회춘하지 않는 이상 평생 예전 같을 순 없을 것이다. 건강을 조금 잃고 나니 사랑 표현에 대한 기준도 점점 현실적으로 변해간다. 너와 함께라면 평생 나물 반찬만 먹어도 좋아. 아무리 피곤해도 자기 전에 3시간은 같이 앉아있어 줄게. 자고 일어나서 나는 너의 입냄새도 좋아해. 별도 달도 따준다는 말보다 이런 말들이야말로 진정한 순도 백 프로의 사랑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봐도 로맨틱하지 않다.
건강하다는 거, 생각보다 로맨틱한 일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