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저도 술을 잘 마시고 싶었습니다.
저는 한때 술고래가 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알코올을 위장에 아무리 쏟아부어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술고래. 물이 아닌 술에서도 팔딱팔딱 잘만 살아 숨 쉴 것 같은 그런 사람이요.
법적으로 음주가 허락되지 않는 만 19세까지는 제 주량에 대해 줄곧 상상해 보곤 했어요. 술이 뭔지 잘 모르지만 이왕이면 잘 마시는 게 멋있을 것 같았습니다. 티브이의 토크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술에 관해 하는 이야기들, 예를 들면 아침까지 술판을 벌이고도 집에 멀쩡히 돌아갔다던가 주당으로 알려진 모 연예인의 주량이 소주 열 병 이상이라는 것, 그리고 패널들의 감탄하는 리액션을 보고 있자면 ‘나도 잠재적 술꾼이지 않을까?’라는 은근한 기대가 생겼어요. 주당으로서의 제 로망은 핸드백 안에 소주 팩을 우유 팩인 척 넣고 다니며 캠퍼스 안에서 쪼롭쪼롭 은밀하게 알코올 수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쩌다 생긴 환상일까요?)
그러나 그토록 기다리던 성인이 되었을 때, 제 모습은 환상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니 완전히 정반대라고 해야겠죠. 저는 술을 아예 못하는 일명 ‘술찔이’였거든요.
저는 술을 한 잔만 마셔도 너구리처럼 눈 주위를 제외하고 얼굴이 시뻘게지는 데다 금세 취해버리는 인간이었습니다. 즐길 수가 없으니 알코올은 아무리 마셔봐도 늘 맛이 없더라고요. 30대가 된 지금도 알코올은 쓰고 떫어요. 전 오로지 칵테일과 하이볼, 스위트 와인만을 취급합니다. 그것도 딱 한 잔만요.
알쓰, 술찌, 술찔이…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저를 부르는 말은 다양했어요. 그나마 저는 술찔이가 나은 것 같습니다. 술 못 마시는 사람을 그나마 가장 귀여운 어감으로 표현한 것 같고 또 사람은 누구나 찌질한 구석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알쓰는 좀 뭐랄까… 알코올 좀 못 마신다고 사람을 쓰레기 취급하다뇨? 그건 용납할 수가 없네요.
술찔이에게 가장 먼저 닥친 위기는 미팅이었습니다. 미팅이란 고로 젊은 남녀가 술기운을 빌려 서로를 탐색하는 보급형 연애 예능의 현장이지요. 그러나 술 한 잔에 얼굴이 붉은 너구리가 되고 젓가락을 놓치기 일쑤인 저는 미팅을 즐기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미팅을 고대해 왔던 여고생에게는 잔인한 현실이었죠. 하지만 흥이 오르기도 전에 발음이 꼬이는데 어떡합니까.
사실 미팅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저는 그다지 놀이 문화를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고 미팅의 열기는 딱 2년만 지나도 금세 사그라들더라고요. 연애가 목적이라면 소개팅이라는 대안도 있었고요.
진짜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잦아지는 술자리 그 자체였어요. 아예 멀쩡한 정신이거나 한 잔으로 훅 가거나. 제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극단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제 선택은 일 번, ‘아예 멀쩡한 정신’이었어요. (아닌가요?) 멀쩡한 정신으로 취해가는 사람들을 보자니 그것만큼 정떨어지는 광경이 없었습니다. 이 바보들, 왜 스스로 품위를 낮추는 거야?
이성을 꽉 쥔 상태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습니다. 작은 것에도 폭소를 터뜨리는 대화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고요. 술자리가 금방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졌거든요.
그리고 정산. 가장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는 바로 돈 문제였어요.
술찔이도 평등하게 n분의 1의 술값을 부담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하이볼이라 할지라도 아주 천천히 마십니다. 식사 자리가 다 끝날 때까지, 얼음이 녹아 알코올 농도가 반토막이 나도록 딱 한 잔을 홀짝홀짝 마셔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뛰고 홍조가 생깁니다.)
그동안 나의 친구들은 한 잔씩을 더 시키지요. 이해합니다. 저도 굳이 제 속도를 맞춰주길 바라지는 않아요. 각자 자기 양에 맞게, ‘상대적’으로 즐기면 되는 일이죠. 그렇지만 정산은 ‘절대적’으로 하더라고요. 칼같이 균등하게.
한번은 퇴근하고 회사 사람들이 있는 족발집에 들렀습니다. 당시 코로나 방역 지침이 꽤 엄격해서 식당의 영업 시간은 밤 10시였어요. 저는 9시가 조금 넘어 그 족발집에 도착했고요. 맥주 한 잔을 받아서 고사를 지냈는지 아예 물만 마셨는지 기억은 잘 안 납니다만, 그분들이 저에게 16,000원의 정산금을 요청했던 것은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분들과는 아직도 연락을 잘 하고 지냅니다. 같이 다니던 그 회사는 망해서 없어졌지만요. 이 얘기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하기로 할게요. 어쨌든 지난달에 그분들과 엠티를 갔었는데 말이죠.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다들 술을 잘 마신다며 맥주, 소주 할 것 없이 술을 궤짝으로 삽니다. 술 마시는 사람들은 술이 떨어지는 걸 재앙처럼 여깁니다. 술이 부족하면 뭔가 큰일이 나는 줄 아나 봐요. 술찔이의 입장에서는 마실 술이 떨어지면… 이 닦고 코 자면 되는데 말이죠. 그래서 항상 술은 넘치게 사더라고요. 그러나 저는 그 중의 맥주 한 캔도 채 마시지 못합니다. 능력도 안 되고 맛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역시나 장 본 값은 인원수대로 정확하게 나누어 계산합니다.
왜일까요?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사실 여러 사람 앞에서 돈 문제를 제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것도 다대일인 상황에서는 특히나 말이죠.
그렇다고 꾸준히 참아내진 않습니다. 서서히 참석 횟수를 줄이다가 카페와 수다를 좋아하는, 혹은 카페와 수다’도‘ 좋아하는 사람들 쪽으로 붙습니다. 저도 비용 대비 만족스러운 즐거움을 찾아야 하니까요.
그들의 무덤덤함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계속 의문이 생겨요. 과연 이 정산의 문제점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만약에 그동안의 모두가 ‘술찔이가 n분의 1에 동참해 주니 너무 좋군! 켈켈켈’ 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연히 분노가 치밀어 오를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기분이 썩 나아지진 않아요. 손해를 보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그러려니 넘어가는 게 인간의 본능적인 이기심인 것 같거든요.
한 사람(또는 한 무리)에 대한 크나큰 실망이냐, 조금의 인류애 상실이냐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과연 제가 술고래였다면, 술찔이들의 고충을 자발적으로 이해하려고 했을까요? 먼저 나서서 정산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을까요? 사실 그것도 별로 자신이 없어요. 소수의 입장에서 이런 의문을 끊임없이 감내해야 하는 것도 그저 술찔이로 태어난 제 몫인 거죠. 덕분에 반강제로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뽑기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이왕이면 술고래를 뽑을 걸 술찔이를 뽑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