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영이 Jun 13. 2022

인생사 새옹지마


새옹지마 [塞翁之馬]

: 좋은 일이 있어도 그 일로 말미암아 나쁜 일이 생길 수 있고

나쁜 일을 겪어도 그로 인해 좋은 결과가 파생될 수 있다는 선조들의 지혜이자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심금을 울리는 좌우명.     



아주 작은 순간부터 인생의 굴곡을 만드는 큰 흐름까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윤회적인 인생사를 겪어왔기 때문에, 나는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삶의 이치를 뼈저리게 느껴왔다. 불행인 듯 다행인 듯 지금 직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었고 이건 이곳에서의 가장 최악의 경험과 그로 인해 파생된 최고의 결과에 관한 이야기이다.     



때는 12월 즈음, 부산 촬영 때였다.

촬영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인물 소개를 하자면, 먼저 우리 회사는 팀원 위에 매니저와 팀장이 있는 조직이다. 팀장과 매니저는 반장과 부반장 같은 세트 개념인데, 예능팀 팀원들이 경력이 거의 없는 신입인 반면에 매니저와 팀장만은 10년 이상의 방송 경력자로 방송국 물이 단단히 들어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각자의 방식으로 거친 남성주의 구조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자 꼰대주의가 익숙한 인간들, 여성 작가들의 직장 생존기에 등장할법한 면모를 두루 갖춘 인물들인 것이다. 그들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방송국에서처럼 우리 직원들을 대하지 말라는 대표님의 타이름이 있었다고 들었으나 그들은 그런 보송보송한 당부 따위는 귓등으로 흘려버린 듯했다. 이곳의 분위기를 자신이 익숙한 방송국처럼 만들고 말겠다는 불길한 야심을 드러내는 팀장과 총명함을 잃어버린 눈빛으로 충성하는 매니저, 이 둘의 모습은 마치 라이언킹의 검은 사자 스카와 그 옆을 맴도는 하이에나 같았다.    


  

그들의 첫 번째 표적은 나였다.

첫 번째라기보다는 원앤온리에 더 가깝긴 했지만.

우리 팀원들은 멋진 MZ세대답게 부당함에 즉각적으로 반응했고, 비효율과 비논리를 참지 않았다. 알아서 기는 사람만 익숙했던 팀장과 매니저가 ‘나는 순종적인 사람이 아니야’라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팀원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뒷담화뿐이었다. 그러나 상처 주느니 상처받는 선택을 하는 INFP답게 나는 그들의 지시, 부탁, 제안, 호출 그 무엇이든 언제나 긍정적으로 응했고, ‘내가 당신들의 말에 집중하고 있어요’라는 느낌을 발산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리액션에 충실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팀원들에게는 함부로 시도하지 못하는 행동들이 모두 자연스레 나를 향해 있었다. 나에게만 주말 출근이 강요되었고 내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자리에도 불려 다녔으며, ‘오늘도 다들 고생했고 고영만 남고 퇴근해라’라는 말이 매일 반복되었다. 법인카드로 저녁을 해결하고 퇴근하려는 미혼 중년 팀장의 식사 자리를 채워주고자 남겨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내가 그들의 애착 인형이 된 것 같았다.



나의 이미지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정점을 찍은 것은 바로 이 부산 촬영 때였다.

왜인지 출발 전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였던 팀장은 나에게 서서히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우리 미혼의 중년 팀장은 말수가 좀 많은 편인데, 자신의 연애사로부터 시작된 대화 주제를 결혼과 결혼정보회사로 꺾더니 결혼은 하고 싶으면서 눈은 낮출 생각이 없는 여자들의 한심함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어째 불안하더라니 곧이어 아무 말 없이 뒷자리에서 사리고 있던 나에게 냅다 화살이 꽂혔다.     


팀장        (갑자기 홱 뒤를 돌아보며) 야 고영!

              너도 나이 막 40 이렇게 돼도 애 안 낳고 그럴 거야?

고영        지금은 그럴 것 같은데요...?

팀장        하... 너 그러면 남자가 밖에서 애 만들어 와도 할 말 없는 거야

             나는 내 아내가 그러잖아? 그럼 밖에서 만들어 올 거야

매니저    하하핫! 그게 이혼 사유가 안 되긴 한다더라고요?

팀장       고영이 빨리 결혼시켜서 출산시켜야지~


그날 차 안에서 오고 간 모든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대화를 적자면 위와 같고,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들을 적는다면 ‘야동’과 ‘자위’가 되겠다.

여자는 나 혼자인 곳에서 나를 청자로 인식은 하고 있되 의도적으로 배려하지 않는 대화는 다분히 폭력적이었다. 4시간이 넘게 걸리는 부산행 차 안에서 축축하고 어두운 대화의 한가운데 빠져 조금씩 숨이 가빠 오기 시작했다.      



그 이후의 촬영 현장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너무 긴장했기도 했고 눈치 보느라 정신이 없었던 나머지 메모리 기록 버튼을 깜빡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마지막 촬영지였던 레이싱 체험장에 대한 기억은 있다. 안전상 제작진 전원이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다가와서 괜한 잔소리를 하던 팀장이 내 헬멧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쿵! 쿵! 쿵! 쿵! 정확히 네 번, 내리쳤다.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은 머리가 울리면서 흔들렸던 시야도, 헬멧을 뚫고 느껴진 아픔도 아니었다. 미묘하게 웃는 듯한 팀장의 무표정과 반응을 구경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날은 하루 온종일 촬영을 했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던 나머지 밥을 먹는 따위의 안일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숨죽여 많이 울었다. 더 이상 한순간도 못 견딜 것 같은 마음 상태가 되자 나도 모르게 손가락은 대표님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입사 이래 처음으로 대표님에게 먼저 면담을 요청했고, 복귀 직후 내가 겪은 모든 일들과 팀을 옮기고 싶은 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실 팀장 때문에 팀 이동을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

팀장의 만행은 대표님에게 일러바치는 것으로 충분했고, 팀 이동은 마침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지금이 기회다 싶어 같이 끼워 보낸 카드였다.

예능 작가로 입사하긴 했지만 사실 내가 원했던 커리어는 예능 작가보다 시나리오 작가였다.

회사 내에 웹드라마 팀이 신설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본능처럼 심장이 뛰었지만 정신없이 굴러가던 예능팀의 스케줄에 면담을 요청할 용기도, 여유도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경력도 없고 전문 작가도 아닌데 받아 줄까?’와 같은 우려에만 확신을 가질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당한 일들이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자, 마치 그런 우려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이제까지 내가 예능팀에서 했던 일들과 내가 진짜 자신 있는 일이 어떻게 다른지, 웹드라마 팀에 간다면 어떤 콘텐츠를 만들 생각인지 대표님을 앉혀두고 줄줄 어필을 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겪었던 팀장의 만행과 웹드라마 업무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미처 몰랐지만) 의외로 새 작가가 필요했던 웹드라마 팀의 상황이 하나의 리듬처럼 딱 맞아떨어졌고, 나의 팀 이동에 대해 그 자리에서 즉시 대표님의 OK가 떨어졌다.     



일사천리로 일주일 만에 자리를 이동했고 웹드라마 팀과 환영 회식을 했으며 지금은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매일 행복한 야근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종종 생각하곤 한다.

예능 팀에서 내가 최전방에 있지 않았다면, 팀장과 매니저로부터 그 모든 정신적 고통과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감정이 극한에 치닫지 않았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고.

그러니까, 정말로, 인생은 ‘새옹지마’인거다.

작가의 이전글 예쁜 쓰레기를 또 사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