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필립 로스, 『에브리맨』
웹드라마 파트로 옮겨간지 어언 7개월.
이 말은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친 지 일곱 달이나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시나리오란 어떻게 쓰는 것인지 연구한 지 7개월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 쓰는 일, 솔직히 쉽게 봤었다.
내가 아직 예능팀 작가로 있을 때, 알음알음 웹드라마팀의 시나리오를 주워다 보고선 크게 두 번 놀랐었다.
문단 나누기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아 마치 통째로 들어낸 스팸 같은 글 덩어리에 한 번 놀랐고,
한 글자씩 뜯어보고선 그 뭐랄까.. 여기저기 박혀있는 오타와 비문들의 다채로움에 두 번 놀랐다. 그때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쓰겠다.”
아니,
“내가 더 잘 쓰겠다.”
내가 어떻게 쓰든 저것보다 야는 잘 쓰지, 라는 자신감으로 (그리고 그때는 촬영 구성안 말고 시나리오 류의 글에 목이 말라있었다) 웹드라마팀의 유일한 작가로 넘어왔는데, 이게 웬걸. 막상 백지 위에 지어내자니 문간에 서서 눈밭을 내다보는 고양이처럼 한 발짝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뭐라도 써야지, 발자국을 남겨야지 싶다가도 누가 볼까 무서워 재빨리 지워내거나 괜히 유튜브 창을 켜서 한글 창을 가려 버리곤 했다. (지금도 이러고 있긴 하다.)
요즘 유행한다는 웹소설을 보며 ‘아이고야, 이런 게 문학이라고?’탄식과 함께 이마를 탁 치며 차세대들의 문해력을 걱정하던 나였는데 직접 한 글자, 한 글자 쌓아 올리려니 어지간한 웹소설은 전부 꽤 튼튼하게 잘 지은 주택 같아 보였다.
한 회차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일주일째 붙잡고 있었을 때, 이제 더 이상 붙잡고 늘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PD에게 대본을 넘긴 적이 있다. 이미 넘기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이 글은 쪽팔리다.
파일을 넘기고 조용히 스크롤이 내려가는 동안의 정적을 견딜 수가 없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담배라도 피웠다면 세 대는 태우고 들어갔을 것이다. 자리로 돌아가니 PD는 여자 처자 피드백도 없이 뭐가 제일 어렵느냐고 물어봄으로써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 부스러미 마저도 말소시켰다.
피드백이 아닌 새로운 소재를 던져주는 PD를 보며, 그리고 그가 던져준 이야기의 방향성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스스로의 자격이 의심되어 솔직히 말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다짐했다.
‘진짜 다시 써보자. 뭘 써도 이것보다 나을 테니까.’
초조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하고 1분마다 자세를 바꿔 앉으며 글을 아예 엎어버리고 새로운 대본을 썼고, 결국엔 그 대본으로 촬영까지 해냈다. 그러고 나니까 깨달은 바가 있더라.
글쓰기는 쪽팔림을 견디는 것이구나.
여기서의 쪽팔림은 완성본으로 가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것 같다.
초고를 보면 그렇게 유치할 수가 없다. 누가 봐도
“나도 쓰겠다.”라고 할 것 같은 글.
그렇지만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이 유치한 글들을 모아놔야 수정이라는 것도 가능하고 재구성을 해볼 수도 있고... 어찌어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자뻑.
일주일째 붙잡고 있던 대본을 억지로 넘기면서 내가 한없이 초라해졌던 것은 작가로서 자뻑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쓴 창작물, 누가 뭐래도 내 새낀데 내가 칭찬하지 않으면 누가 좋게 봐주겠어. 자뻑은 앞으로의 글쓰기를 지속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 자존심이 살아남기 위해서(이게 핵심) 작가로서의 필수 자세다.
자뻑. 그리고 쪽팔림을 견디는 것.
내가 스스로 깨우친 바, 글쓰기의 핵심은 바로 이 두 가지이다.
어떻게 보면 같은 뜻일 수도 있지만.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글쓰기는 반짝이는 해답을 찾으려는 과정이 아니라 자뻑과 쪽팔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고 꾸준히 써내려 가는 것이다. 끝에 도달할 때까지.
지금도 여전히 글 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고, 정말 최후의 순간에, 이번 주 업로드를 펑크낼 것 같으니 결국은 사직서를 내야겠다고 다짐하는 그 마지막 순간에 와서야 비로소 글이 완성되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잊게 해 줄 정도의 정신적인 보상을 받고 있기에 오늘도 글을 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참 다행이다, 고 되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