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효율성은 제 1의 가치가 아닐 수도 있다.
집 근처에 산책하기 좋은 곳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행운이다. 게다가 그 곳에 흙길이 있고, 작은 산길 안내 표지판이 있고, 적당한 경사가 있다면 야트막한 뒷산이라 하더라도 동네 주민들에게는 꽤나 큰 기쁨이 되어준다.
나는 공원보다는 뒷산이 더 좋고, 더운 날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는 산보다 비온 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촉촉한 냄새가 나는 산을 더 좋아한다. 산에는 사람들과 내가 무서워하는 반려견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조용히 생각하기도 좋고, 마음에 드는 오디오북을 들으며 걷기도 좋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왜 굳이 습한 날의 산책을 으뜸으로 꼽는 요상한 취향을 갖고 있냐고 물으신다면 '걸을 때 발소리가 좋아서요.' 라고 답해드릴 수 있겠다. 흙이 적당히 젖어 있을 때 걸으면 터벅터벅 소리 사이에 젖은 흙이 으깨지는 설명하기 미묘한 소리가 같이 나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오늘은 모처럼 혼자 산책을 나왔기에 몇 안되는 뒷산 루트 중에서도 하드코어만을 고집하는 엄마의 취향에서 잠시 벗어나 평소에 눈 여겨 보았던 '무 장애길'로 갔다. 총 길이가 600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길을 세 번정도 걸으며 떠올렸던 여러 생각을 풀어보고자 한다.
4년 간 특수교육을 전공했어도 '무 장애길' 이라는 표지판과 그 특성이 설명된 안내판을 보기 전까지는 겨우 산 행세를 하고 있는 이 곳을 못 오르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 졸업장이 아무 쓸모도 없음을 몸소 증명한 꼴이 되어버렸다. 이 길은 꼭 자유로운 신체 움직임이 어려운 사람들만을 고려하여 만든 길이 아니다. 경사로가 힘든 어린아이들에게도, 임산부들에게도, 유모차를 끌고 산을 찾은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나처럼 체력이 다른 의미로 탈인간급이어서 산에 있는 계단을 여름철 모기만큼 혐오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길은 유용하다.
영상은 무 장애길의 나무데크를 걸으며 찍은 영상인데 19초 정도 된다. 원래는 1분 정도 되는 영상을 편집한 것인데, 그 1분도 나무데크 길 전체를 걸으며 찍은 것이 아니다. 즉, 무 장애길을 이용해서 도착지점까지 가려면 (무려) 1분은 넘게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여 경사로로 내려가고, 이후에 계단으로 내려가면 도착지점까지 1분도 안걸려서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 경사로와 계단이 이름값도 못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그래서 무 장애길의 나무데크는 늘 한적하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 내에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우리에게 이 길은 효율성 빵점의 길이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효율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오늘 나는 왼쪽의 '무 장애길'을 원해서 선택했지만, 언젠가는 '무 장애길' 밖에 선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는 이는 나 뿐만이 아니기에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이 길은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인 셈이다.
더 나아가서 나의 작은 바람이 하나 있다면, 앞으로는 이러한 '무 장애길'이 더 많이 만들어져서 지팡이를 짚은 사람들이,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이, 워커와 목발을 착용한 사람들이 산을 산책하는 풍경이 어색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에게는 생경할 그 풍경이 아이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이 된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