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고래 Apr 27. 2020

눈물겨운 현실 속 빛나는 재기발랄함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2017)를 보고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One Cut of the Dead, 2017)를 보고


먼저 영화를 보실 생각이라면, 이 글도 읽지 마시고, 어떠한 정보도 찾지 마시고 그냥 재생하길 바란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거나 보기 전에 네이버에서 뭐라도 찾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만, 이 영화는 알고 보면 볼수록 재미가 반감된다. 특히!! 절대로!!! 예고편은 보지말 것!!! 

이 영화의 예고편은 영화를 보고 보셔야 한다. 미친 소리같겠지만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이다. 영화를 보고나면 왜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그렇다고 딸랑 제목만 아는 상태에서 영화를 볼지 말지 결정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므로 나름의 기준을 정해보았다. 이 세가지 항목 중 하나라도 해당하시는 분이라면 정말 즐겁게 보실 수 있을 것이다.


1. 나는 B급으로 가장한 웰메이드 A급 영화를 좋아한다.

2. 신파와 교훈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영화를 보고 그냥 생각없이 웃고싶다.

3. 코미디 영화라면 덮어놓고 다 좋다.


나의 읍소에 혹 마음이 움직여 관람을 마음먹으신 분들께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을 인용해서 마지막 주의사항을 전달해드리고자 한다. "30분 정도 되는 그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은 톡톡튀는 재기발랄함으로 중무장한 쌈마이 코미디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꼭 뛰어넘으시길!



(스포일러 O, 스포일러 강도 극上)



포스터의 장벽도 만만치 않다... '끝까지 간다'의 비극을 다시 보는 느낌..ㅠ


우리나라 TV 프로그램 서프라이즈의 재연영상 같은 종류의 영상을 찍는 감독에게 의뢰가 들어온다. "빠르고, 싸고, 품질은 그럭저럭" 이라는 캐치프라이즈를 가진 감독은 시청자 입장과는 상관없이 대다수의 클라이언트들의 요구에 최적화 된 사람이다. 현실적인 작품세계를 가진 감독에게 들어온 의뢰는 새로운 채널 개국을 맞아 방영되는 일회성 TV쇼 프로그램으로, 단편 좀비 리얼리티 드라마(?)인데 이게 또 생방송이 되어야 한다. 현장의 사정과 여건에 무지한 대가리들이 늘상 하는, 책상에서 자기들끼리 대충 떠들다가 나온 떨이 아이디어들을 누덕누덕 기워서 형편없는 천쪼가리로 만들어 놓은 듯한 기획이다. 누구보다 현실적인 감독인데 당연히 이 기획이 내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에 딸래미가 환장한 남자 배우가 참여를 한단다. 곧 독립하는 딸래미와 서먹해서 신경쓰이는 와중에 딸의 환심을 살 기회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돈도 벌고. 이러한 이유로 내키지 않는 기획을 수락하고, 이 천쪼가리를 그럴듯한 조각보로 만들어보기 위해 감독은 부단히 노력한다. 쇼 비즈니스 업계에서 볼 수 있는 갖가지 진상들이란 진상들은 다 모아놓은 제작 환경에서도 감독과 스태프들은 열심히 고군분투하는데 촬영당일 생방송 전과 생방송 중에 그 어떤 임기응변으로도 수습되기 어려운 사고가 연달아 터진다. 그렇지만 수습하지 못하면 이 시대의 가장이 아니지. 이 눈물나게 웃긴 수습의 결과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화 초반 30분동안 '이걸 봐야 해, 말아야 해?' 하게 만드는 저급한 퀄리티의 좀비물이고, 영화 중후반에서는 왜 이런 저급하고 조악한 좀비물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 상식적인 방송에서라면 나올 수 없는 갖가지 실수들이 초반 좀비물에 왜 나왔는지 시원한 웃음과 함께 그 해답을 제공한다.



영화 초반만 봤을 때와 중반에 이 장면을 다시 보았을 때의 느낌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다시 나왔을 때 감독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절함 그 자체..

영화에 나오는 감독(이 영화를 찍은 진짜 감독이 아니다!)을 보면서 우리네 아버지들이 많이 생각났다. 꿈도 있고, 나름의 야망도 있었을 찬란한 청춘은 어느새 가장의 무게에 짓눌려 매너리즘과 고단한 삶이 일상이 되버린 중년이 된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하와이안 셔츠가 잘 어울리는 이 감독도 분명 꿈과 열정으로 가득찬 신인 감독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생기면서 자신의 꿈만을 고집하기에는 현실의 벽은 너무도 컸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그는 눈물연기에 안약을 쓰는 것에도 무덤덤해진 매너리즘에 젖은 감독이 되었겠지. 그런 감독에게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어가는 딸과 안약을 쓰지 못하게 하는 그녀의 융통성 없는 열정을 보는 아빠의 마음은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자신이 거쳐왔던 고단한 길을 자식도 거친다는 것에 대한 안쓰러움과 한편으로는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애정. 그리고 내 자식은 자신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뿌듯함. 이 지랄맞은 일을 맡은 이유도, 그리고 자신의 삶의 이유도 결국 딸이었는데. 그래도 마무리를 딸이 훌륭하게 해내고, 딸이 아빠의 애정까지 확인할 수 있었으니 이거야말로 코미디 영화에서 보여지는 궁극의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또 떠올랐던 것은 중,고등학교 때의 방송부 활동이었다. 방송부원 시절을 떠올려보면 '조악한 결과에 그렇지 못한 미친열정'이 생각난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모두 방송반을 했어서 더 깊이 울분을 토할 수 있다.(심지어 기계와 카메라 담당!) 방송반은 잘해야 본전이다. 칭찬은 없고, 문제 없게 진행하는게 당연한거다. 근데 못하면 욕은 오지게 먹는다. 뻑하면 고장나는 장비랑 씨름하고, 필요한 음악, 영상은 제 때 안나오고, 학교 방송반이 지상파 방송국이라도 되는 마냥 착각해서 온갖 말도 안되는 요구들이 넘쳐난다. 이런 수난을 겪고 무사히 행사를 마무리하면 막상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끼리는 엄청 만족스럽고 자화자찬을 한다. 그 기분에 또 다음 행사를 열심히 준비한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감독에게 기획을 의뢰한 인물(맨 오른쪽 단발머리 여성)도 대단한 결과물을 요구하는게 아니다. 개국특집에 걸맞는 규모의 대작을 만들어야 했으면 애초에 빠르고 싼데 품질은 그럭저럭밖에 못 만들어내는 감독에게 의뢰가 갔겠는가. 사람을 갈아서라도 고품질의 영상을 만드는 감독에게 의뢰했겠지. 편성표에 빈칸을 둘 수는 없으니까 대충 시간 때우기용으로 의뢰한 것이다. 의뢰부터 진지하지 않으니 생방송으로 방영되는데 신경도 안쓴다. 누가봐도 문제가 있는게 분명해도 크게 개의치 않고 중간에 계속 핸드폰이나 하다가 밥 먹을 때 되니까 곧바로 일어나서 밥 먹으러 간다. 시청률이나 시청자들의 실시간 반응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눈에 띄는 큰 문제만 없이 중간만 가면 되는 기획이니까. 

방송부원에게 부여되는 임무도 동일한 성격이다. 엄청난 결과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적당히 행사 진행에 문제만 없으면 그만이다. 노래와 마이크 음량과 재생 타이밍, 카메라의 앵글이나 초점은 정밀할 필요 없다. 선생들이나 학생들 보기에 이상 없으면 되는 것이며 이에 대해 칭찬은 없다. 당연한 거니까. 그래도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도저히 대충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해야하는 과업의 성격과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One Cut of the Dead의 배우, 제작진, 감독과 방송부원이었던 나.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일을 했을지 알기에 짠하면서도 마지막 인간피라미드 지미집에서 나라도 마구 칭찬해주고 고생한 것을 대신 광고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많은 분들이 영화도 보고, 내 리뷰글도 봐주셨길 바라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짧게 쓰려고 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도저히 짧게 써지지가 않는다..ㅠㅠ


덧1. 나는 초반의 허접한 C급 좀비물 영상을 굉장히 재밌게 봤는데ㅋㅋ 나름 스릴도 있었고, 허접해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입덕장벽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나중에 평가들을 보고 놀랐다. 나만 그런건가...?

덧2. 마지막에 실제 촬영 비하인드를 보고 느낀 점. 역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지만 피어나지 못한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