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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eunpa Oct 08. 2024

고국원왕故國原王

불운했으나 마지막까지 고구려의 왕답게 살다 간 군주


고구려 미천왕美川王(고구려 제15대 왕, 재위 300~331)은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의 주인공으로, 흔히 고구려의 정복군주라 하면 광개토왕廣開土王(고구려 제19대 왕, 재위 391~413)을 언급하지만, 광개토왕 이전 활발한 대외진출을 통해 고구려의 기반을 닦은 이로 미천왕이 있었습니다.


미천왕은 중국 한漢나라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 후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인 현도군을 공격하여 8,000명의 포로를 사로잡는가 하면, 당시 요동과 한반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 서안평을 점령한 뒤 한사군의 낙랑군과 대방군을 오랜 투쟁 끝에 병합하는 등 고구려가 신흥 강국으로 뻗어나가는 데 발판을 다진 인물입니다.


고국원왕故國原王(고구려 제16대 왕, 재위 331~371)은 아버지 미천왕美川王의 뒤를 이어 즉위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활발한 대외진출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는 점에서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끈 장수왕長壽王(고구려 제20대 왕, 재위 413~491)과 비슷한 배경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국원왕 즉위 시 고구려의 이웃에는 때마침 국운팽창기에 있었던 위협세력이 둘이나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 미천왕 때부터 수없이 부딪힌 요하 서쪽의 모용선비(전연前燕)*1였고, 다른 하나는 같은 뿌리를 두었지만 이제는 너무 멀어져 버린 남쪽의 백제였습니다.


고국원왕은 태자 시절부터 모용선비(이하 전연)와의 치열한 세력 다툼을 봐왔기에  즉위 초반 전연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나라의 북쪽에 신성을 쌓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고구려와 전연의 본격적인 충돌은 342년 연왕燕王 모용황이 중원 진출을 위해 수도를 용성龍城(지금의 요령성 조양시)으로 옮기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전연은 중원 공략 전 신흥강국인 고구려를 반드시 굴복시켜 후환을 없애고자 했어요.


당시 전연에서 고구려를 공격하러 가는 길은 북도와 남도 두 길이 있었습니다. 북도는 오래된 교통로로, 평탄하고 넓었어요. 그에 반해 남도는 좁고 험했죠. 전연은 고구려의 방어선이 북쪽에 집중될 것을 예견하고 남도를 선택합니다. 불행하게도 고구려는 전연의 예상대로 움직여 고국원왕은 자신의 동생에게 정예군 5만 명을 이끌고 북도를 지키게 하고는, 자신은 소수의 병력만으로 남도를 방어하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이 선택은 결국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고구려의 허를 찌른 전연의 공격에 고구려 수도 국내성이 함락되었고, 왕의 어머니와 왕비가 인질로 잡혔습니다. 고국원왕은 홀로 도주하는 등 치욕스러운 대패를 하고 말아요. 그러나 전연 역시 마냥 도망간 고국원왕의 항복을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북도로 간 고구려 5만 정예군이 돌아오고 있었고, 전연에게는 아직 고구려를 완벽히 굴복시킬 힘까지는 없었거든요.


고구려의 보복을 두려워한 전연은 먼저 포로로 잡았던 왕의 생모와 왕비로도 모자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강탈하고는 5만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갔습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쉽사리 전연을 공격할 수 없었고, 전연은 고구려를 두려워하지 않고 중원 공략에 나설 수 있었어요.

미천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서대총' 전경.*2 일제 강점기 때 사진입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전연이 돌아가고 3개월 뒤 고국원왕은 신하를 자칭하며 수많은 보물을 전연에 바침으로써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지만, 고구려의 보복공격이 불안했던 전연은 왕의 어머니만큼은 쉽사리 돌려보내지 않고 붙잡고 있다가 13년 만에야 풀어주었습니다.

안악 3호분 묘주부부상. 안악 3호분의 주인을 고국원왕으로 보기도 합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 고분벽화 3D 가상전시관)

고국원왕은 전연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입은 뒤 국난 수습과 재건을 위해 남쪽으로 눈을 돌려,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하여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습니다.*3 그러나 이것도 불운이라면 불운이겠죠. 당시 고구려의 남쪽 백제에는 걸출한 인물이 왕위에 올라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거든요. 그 인물이 바로 백제 전성기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근초고왕近肖古王(백제 제13대 왕, 재위 346~375)입니다. 고국원왕의 남쪽 경영은 백제 근초고왕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국원왕은 369년 몸소 2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쳐들어갔으나 치양(지금의 황해도 배천)에서 5천여 명의 인질을 백제에게 붙잡히는 등 대패하였고, 371년 재차 백제를 공격했을 때에도 근초고왕의 매복 작전에 걸려들어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며 기세가 오른 근초고왕은 3만의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으로 진격했죠. 고국원왕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몸소 전장에서 백제군에 맞서 싸우다 전투 중 흐르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4


아버지의 위업을 잇지 못한 채 고국원왕은 쓸쓸한 가을날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록 패배의 굴레를 끝내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늙은 몸을 이끌고 몸소 전장의 최전방을 누비며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진정 용감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小獸林王(고구려 제17대 왕 재위 371~384) 시대에 눈부신 내치의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 고국원왕이 닦아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 즉위한 손자 광개토왕 대에 이르러 비로소 한을 풀고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1) 전연은 중국 5호 16국五胡十六國의 하나로, 선비족 모용황慕容皝이 337년 건국하였다.

*2) 안악 3호분의 주인에 대해서는 고국원왕 외에도 고국원왕 때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冬壽나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이라는 주장이 있다.

*3) 『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6, 故國原王 13年(343) 秋7月.

*4) 『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6, 故國原王 41年(371) 冬10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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