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eunpa Nov 26. 2024

겨울의 문턱

김치 담그기_한국의 김장 문화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폭염이 지나고, 짧은 가을을 거쳐 어느덧 입동入冬, 소설小雪이 모두 지났습니다. 입동立冬 전후가 되면 동네의 작은 상점, 대형마트 가릴 것 없이 ‘김장용 절임배추 판매’라 써 붙인 것을 쉽게 볼 수 있어요. 얼마 전 마트 입구에 세워진 ‘김장용 절임배추 주문 접수’ 세움 간판을 보니,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철이 돌아왔음을 실감했습니다.


김장은 신선한 채소를 구하기 쉽지 않은 한겨울이 오기 전에, 한국인들이 겨우내 먹을 많은 양의 김치를 담그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의 대표 음식이자 세계적 음식으로 자리 잡은 김치는 소금에 절인 배추·무·오이 등을 갖은양념에 버무려 담근 염장발효식품이에요. 배추·무·오이 외에도 대부분의 채소를 가지고 김치를 담글 수 있습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배추김치, 섞박지(궁중김치), 석류김치(궁중김치), 백김치(평안도)_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 김장문화는 예부터 한국 전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행해진 유사한 풍습이라는 동질성, 지역마다 갖는 독특한 개성, 해외에 거주하는 이들까지 하나로 묶는 민족의 정체성 등이 높이 평가되어 2013년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라는 제목으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발효식품에 대한 이해가 높았어요. 중국 기록에 보면 고구려인들은 “선장양善藏釀”이라 하여 술 빚기 등의 발효음식을 잘한다고 나오며,*1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통일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신라 제31대 왕, 재위 681~692)이 부인을 맞아들일 때 신부의 집에 보낸 납채 품목 중 발효식품인 젓갈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2 이를 통해 이미 고대부터 김치와 같은 발효식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김장문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김치를 담가 겨울에 대비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기록이 고려 후기 이규보李奎報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아래와 같이 확인됩니다.     


得醬尤宜三夏食 장을 곁들이면 한여름에 먹기 좋고

漬鹽堪備九冬支 소금에 절이면 긴 겨울을 넘긴다

根蟠地底差肥大 땅속에 도사린 뿌리 비대해지면

最好霜刀截似梨 좋기는 날 선 칼로 배 베듯 자르는 것     


위 시는 오이·가지·무·파·아욱·박 등 여섯 가지 채소에 관해 노래한 「가포육영家圃六詠」 중 무를 노래한 부분입니다.*3 여기서 보이는 무를 소금에 절여 긴 겨울을 난다는 내용과 고려에 채소 및 채소가공품을 저장하던 요물고料物庫가 있었던 사실을 종합해 보면, 고려시대에 이미 소금에 절인 채소를 저장해 두고 먹는 김장과 같은 풍습이 존재했음을 짐작게 합니다.

「가포육영」 원문 (사진: 한국고전종합DB)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의 김치는 채소를 소금이나 장 등에 절인 형태로, 현재 우리가 보편적으로 먹는 빨간 배추김치의 모양이 아니었어요. 김치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양념 고추는 남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해졌고, 이후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간 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 전인 16세기경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4     


고추는 전래된 뒤 그 독특한 매운맛으로 인해 우리 식문화에 바로 녹아들지는 못했으나, 18세기 영조英祖(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1776) 때 유중림柳重臨이 엮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서 오늘날의 총각김치와 같은 침나복함저법沈蘿葍醎菹法, 오이소박이인 황과담저법黃瓜淡菹法*5 등이 기록된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김치 레시피가 전하게 되었습니다.


18세기 다양한 김치 레시피의 발달과 함께 19세기가 되면 김장문화 역시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 잡은 듯합니다. 1849년 편찬된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장담그기(봄)와 김장담그기(겨울)를 가정의 일년지대계一年之大計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죠.     


오늘날 가족상의 변화와 함께 계절에 상관없이 신선한 채소를 구할 수 있게 되면서, 김치를 가정으로 배달해 주는 전문업체들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한국 가정의 중요한 연중행사였던 김장담그기는 점차 그 모습이 보기 힘들어지고 있어요. 생활양식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가는 것이 인류 문화의 보편적 모습이라 할지라도, 김장과 같이 한국인의 정체성이 담긴 고유 풍습은 한 편에서 꾸준히 유지되었으면 합니다.




*1)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高句麗.

*2) 『三國史記』 卷8, 新羅本紀8, 神文王 3年(683).

*3) 『東國李相國後集』 卷4, 古律詩, 家圃六詠. 

*4) 안정윤, 2010, 「고추, 그 매운맛에 대한 역사민속학적 시론試論 - 한국사회는 왜 고추의 매운맛을 찾는가?」, 『한국민속학·일본민속학 Ⅵ』, 국립민속박물관, 62~66쪽.  

*5) 『增補山林經濟』 沈蘿葍醎菹法, 黃瓜淡菹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