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연의 '나'를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
인간이 성장하며 반드시 이뤄야 할 과업이 있다면
‘부모를 넘어서기’가 아닐까
한때 생존에 가장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존재이자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푼 이들, 가장 깊숙한 곳에 새겨져 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한 개인이 온전한 독립과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넘어서야 할 대상이 부모가 아닌가 싶다.
부모와 내가 각기 독립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아를 형성해 가는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상황이 발생한다. 부모가 건네준 ‘편안함’이 아닌 내 영혼이 숨을 쉬는 ‘평안함’을 획득하기 위한 길고 긴 도전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부모가 바라는 ‘나’를 벗어던지고 ‘본연의 나 자신’을 만나기까지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 십 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이 과정은 결코 쉽지도 순탄하지도 않다.
수문 개폐 조절에 실패한 댐의 물살처럼 마구 흘러넘치는 보살핌과 관심, 사랑의 표현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말하며 ‘No!’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어렵사리 표현한 그 의견들은 성장과 독립의 과정으로 읽히기보다 거절과 배신의 행위로 전달되기 쉽기 때문이다.
착한 셋째 딸로 30여 년을 살다가 부모의 모든 바람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그 시절의 나는 몇 년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녀였다. 부모의 오랜 꿈을 무참히 거절하고 ‘나의 삶’을 찾아 떠났던 몇 년간 나는 부모님의 상한 마음을 모른척하려 애썼다. 아프고 괴로웠지만 이 선택이 나 자신은 물론 가족 모두와 더 깊이 사랑하는 계기를 건넬 거라 믿었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내 삶의 뿌리를 내린 그 길 위에서 부모님과 다시 만났다. 그렇게 다시 만난 두 분은 이 지구 상에서 내 삶 그대로를 가장 지지해 주시는 분으로, 나의 진심 어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부모의 자리를 당당히 지키고 계신다. 부모의 품을 벗어나 그들의 바람을 넘어선 ‘나’가 된 후에야 얻은 진짜 사랑의 관계랄까.
요즘 사춘기 자녀를 둔 입양가정의 위기상담이 늘어나고 있다.
지금껏 한 번도 부모를 거스른 적 없던 자랑스러운 자녀가 사춘기를 거치며 상상도 못 할 강펀치를 날리는 통에 여기저기서 부모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같은 또래를 키우다 보니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 충분히 공감이 되어 주말이라도 상담을 이어간다. 부모와 갈등을 겪는 사춘기 때 누구나 한두 번쯤 ‘나의 부모가 사실은 다른 곳에 있는 건 아닐까? 지금 부모가 나의 친부모가 아닐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이를 심리학 용어로는 <가족 로맨스>라고 부르는데 대부분 이 상상은 명백한 증거와 사실 앞에서 힘을 잃고 만다.
하지만 입양자녀들은 이 <가족 로맨스>가 상상이 아닌 실제임을 알고 자란다. 그러다 보니 지금 부모와의 갈등이 생겼을 때, 마주하고 풀어가겠다는 결심보다는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부모에 대한 갈망을 키우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기도 한다. 입양 사실을 가정 내에서 개방적으로 다루며 관계를 탄탄히 다지지 못했을 경우 가족 로맨스는 가족관계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 집에서 사는 것이 답답해.
엄마가 나를 너무 사랑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나는 친엄마를 찾아서 같이 살 거야
라는 말을 들었다는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다시 재생되는 것 같다. 갈등이 쌓이다 폭발한 상태에서 터져 나온 말이겠지만 그 말을 삼켜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시커멓게 탔을까.
성장하는 자녀를 지키겠다며 꽉 움켜쥐었던 손에서 힘을 스르르 빼는 순간을 그려본다. 품 안 가득 으스러지도록 꼭 끌어안고도 아쉽던 아이에게 이제는 두 팔을 서서히 풀어헤치며 ‘맘껏 달려 나가도 좋아!’라고 이야기해주는 힘 있는 목소리도 상상해 본다. 입양으로 만난 우리 자녀들이 아무 죄책감 없이 부모를 바람을 넘어서고, 부모에게 등을 보이며 달려 나갈 수 있는 그 순간을 선물할 수 있도록 어머니들과 함께 손을 잡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사랑이 족쇄도 아니고, 보답해야 할 은혜가 되지 않도록, 그저 상대의 성장을 위한 모든 의지적인 노력으로만 자리할 수 있도록 사랑을 다시 새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