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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설아 Sep 27. 2021

남편에게 건네는 <밤 편지>

심장이 뻐근한 날의 플레이리스트


여름방학이 시작된 세 녀석을 영주 할아버지 댁에 내려놓고 남편과 단둘이 올라왔다. 사춘기 두 녀석과 우리 집 마지막 어린이를 부모님 품에 맡기고 떠나는 순간, 왠지 안심이 되면서도 여러 감정이 올라와 괜히 운전대를 잡은 남편한테 ‘우리 신혼 같네’라고 농담을 던졌다. 늘 짧은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하는 남편이 오늘은 ‘나도 좋네’라고 덧붙였다. 


녀석 처음 만나러 입양기관 갔던 날, 아기 안아보게 된다고
화장실에서 손 씻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사춘기네


남편의 고백을 듣는데 그랬구나... 우리의 첫 아이를 맞이하던 남편의 첫 순간은 그랬구나 새삼스럽고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어느새 14년간 부모 역할을 해왔네. 갑자기 남편 뒤통수를 찐하게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 


저녁을 먹고 떠난 터라 우리를 따라 달리는 하늘이 계속 얼굴을 바꾸고 있었다. 평화롭게 펼쳐진 구름이 초저녁 금빛으로 반짝이는가 싶더니 먼 곳에서부터 붉은빛을 밀고 오는 게 왠지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아... 오늘은 심장이 뜨거워지는 날이네, 이럴 때 들어줘야 하는 음악들이 있지. 내 어두컴컴한 20대의 얼룩이 스민 음악을 모아둔, 일상과 할 일에 치인 심장이 딱딱해졌다고 느낄 때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꺼내고 만다. 


남편과 둘이 차를 탈 때면 선곡은 늘 내가 한다. 내가 좋아하는 곡을 틀어놓고 목청껏 따라 부르거나, 가사를 잔잔히 곱씹거나, 곡에 얽힌 기억을 남편에게 들려주면 남편은 잘 듣는다. 동갑내기지만 들었던 노래의 세대차이가 무척 큰 우리는 이런 시간을 통해 서로를 몰랐던 시간들을 함께 맞춰간다. 


오늘은 고막을 타고 들어오던 노래들이 서너 곡을 넘기가 무섭게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새겨진 얼룩,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이 선명히 재생되면서 부모님이 알던 착한 셋째 딸은 개나 줘버리라며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모습으로 세상을 헤매던 내 모습이 보인다. 관계에 대한 불안과 자신에 대한 불확실함을 견디느라 힘들었던 20대의 나를 떠올리려니 사춘기를 통과 중인 아들의 지금 모습이 다시 보이고, 부모와 너무 다른 아이, 부모를 넘어선 세계를 갖게 된 아이를 키우시느라 자주 절망하셨을 우리 부모님의 모습도 그 위로 겹쳐진다. 내가 사람 되기까지 지켜보시느라 참 힘드셨겠구나... 뭐라 한마디로 정리하기 힘든 여러 감정이 뒤섞여 밀려든다. 조용히 운전하며 노래를 듣던 남편이 내 마음을 들여다본 듯 한마디 덧붙인다. 


난 녀석이 잘 통과할 거라 믿어.
우리가 곁에서 잘 지켜봐 주면 될 것 같아


원래 이런 류의 멘트는 내 담당인데 오늘은 남편이 먼저 건넨다. 그 말을 꿀꺽 받아 삼키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3시간여를 달리는 동안 20대의 나와 사춘기 부모가 된 나 자신이 어느새 손을 맞잡으며 그때의 모든 얼룩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 내가 아파하는 이들 곁에서 초심을 잃지 않는 이유에는 그 아픈 시간들이 있기 때문임을 다시 되새기게 했다. 더불어 이제 막 자신의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내 아이의 뒷모습도 조금 더 너그럽게 지켜봐 주라는 마음도 건넸다. 세 시간 동안 내 노래를 군말 없이 들어준 남편이 고마워 집 앞 도착 5분 전엔 ‘아이유’의 <밤 편지>를 틀어주었더니 또 피식 웃는다.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유를 좋아하는 해맑은 남편과 나의 사춘기에 비하면 귀엽게 자라고 있는 세 아이와의 보금자리에 다시 발을 디디고 선다. 심장이 아직도 뻐근한 오늘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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