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잡지를 구독합니다.
잡지와의 첫 만남 (Prologue)
아주 사소하지만 누락되지 않고 반복되는 작은 버릇들이 있다. 버스의 좌측 두 번째 칸에 앉는 일, Stacey Kent 음악으로 시작하는 아침, 가방 속에 늘 함께하는 책 한 권 같은 것들. 가방 속 한 켠의 자리가 책이 아닌 월간지로 대체된 것은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 주변의 시간은 조금 느리게 흐릅니다.’
초록과 팬데믹이 우거진 2020년 여름, 한 카페의 책장에서 마주한 잡지 속 문장이다.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멘트였다. 말맛이 있는 글, 홍차처럼 오래 입에 굴리며 향취를 향유할 수 있는 글. 시간을 느리게 하는 책은 그런 글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홍차를 홀짝이며 그것을 단숨에 읽어냈다. 그 안에는 세상의 숱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고, 닮고 싶은 화자가 가득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해당 잡지의 월간지를 구독했다. 이것이 잡지와 나의 첫 만남이다.
잡지의 물성
녹슬고 닳을수록 아름다워지는 것들이 있다. 서랍장 구석에 놓인 어린 시절 사진이나 한산한 새벽 진솔하게 적은 그날의 진심. 다정함이 섞인 누군가의 편지 같은 것. 시간과 함께 낡아지지 않고 더 반짝이는 것들 말이다. 낡음과 함께 윤색되는 가치는 보통 ‘아날로그’에서 온다. 손으로 잡히는 물질의 무게감과 질감을 사랑하는 사람. 사람이 지닌 저마다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 내가 잡지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매월, 혹은 매주 다른 내용을 싣고 오는 잡지는 나를 정기적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살게 한다. 클릭과 함께 모든 내용이 눈에 들어오는 뉴미디어의 특성과 다르게, 표지부터 하나하나 느리게 살펴보는 과정은 독자에게 뜯지 않은 선물을 뜯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게 한다. 더불어 잡지는 단행본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콘텐츠를 뽑아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즉,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질이 유지된다는 이야기다. 그저 트렌드에 맞춰 뽑아낸 콘텐츠가 아니다. 작은 콘텐츠에서 조차 매거진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정성이 느껴진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제작자의 땀과 노력이 담긴 작업의 결과물, 그것이 바로 잡지다.
잡지는 계속된다
“디지털 사진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실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진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더 이상 가족 앨범은 없고 인화된 사진도 없어요. 손으로 만지거나 흔들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그리워하기 시작했지요.” -데이비드 색스 作 아날로그의 반격 中
많은 사람들이 종이 매체의 시대가 끝났다고 이야기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더 이상 종이는 디지털을 넘어서는 주 매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아날로그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아날로그에는 디지털이 지닐 수 없는 물성이 있기 때문이다. 직접 구매하여 만지고 넘기며 톺아보는 동사적 행위가 디지털에는 없다. 사물과의 교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디지털이 일상에 스며들수록 아날로그적 경험을 갈망하는 이들은 많아질 것이다. 필름과 LP가 보편성을 잃어갈 때, 부쩍 그것을 향유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처럼 말이다.
빠른 속도로 진보하는 현대인들에겐 약간의 느림이 필요하다. 디지털의 우수성은 감각에 깊이감을 더할, 음미력을 추구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현대인들의 느림에 대한 욕구가 아날로그적 경험을 추구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잡지도 마찬가지다. 몇 번의 클릭으로 마주할 수 있는 간편한 형태의 웹진이 양산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종이 잡지가 필요하다. 스크롤을 내리며 읽는 웹진은 결코, 종이의 촉각과 책장이 넘어가는 느낌을 구현해내지 못한다.
인간의 오감은 계속해서 종이 잡지를 좇을 거라 짐작한다. 잡지 애호가의 자질구레한 소망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디지털화가 급속하게 진행될수록 늘어날 종이 잡지의 희소성이 고귀한 가치를 갖기를 바란다. 그 가치가 LP의 유행처럼, 필름 카메라의 유행처럼 새로운 잡지의 유행을 빚어내기를, 잡지가 지속 가능한 정보전달 매체가 되기를. 지성껏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