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늦봄의 흔적

그 흔적은 다른 계절의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by 예린 Lily
“나는 어쩌면 책을 아끼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을 모아놓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책에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 밑줄을 긋거나 메모와 낙서를 하는 건 기본이고, 읽던 곳을 표시할 때는 페이지 모서리를 접는 걸 넘어서서 아예 페이지의 반을 접어버린다.”

- 재영 책수선, <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 中


나와 많이 닮은 문장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무언가를 많이 쏟는다. 커피나 우유, 혹은 감상이 옹골진 눈물 같은 것. 남겨진 자국들은 선연하게 남아 회상의 단초가 된다. 또, 나는 독서 중 나만의 표식을 빈번히 남긴다. 고요히 생각을 이어가게 한 문장의 뒤에는 ‘…’을 새겨보고, 신선한 충격을 준 문장 끝에는 진한 느낌표를 새긴다. 그것이 나에게 다시금 파동을 일으킬 것을 기대하며 말이다.



늦봄, 책보다 밖을 더 보는 계절이다.


책을 읽다가도 종잇장 위 여울처럼 흐르는 햇빛에 자꾸 창문을 보게 된다. 책 속 세상보다 다채로운 색이 움트는 계절, 그렇기에 되레 그 풍경 속에서 책을 읽기 좋다.


4월 끝이 다가올 무렵, 봄을 만끽하며 책을 읽기 위해 책방에 갔다. 언제나처럼 2B 연필 몇 자루를 챙겼다. 도서를 펼치기 전, 연필을 날렵하게 깎아 놓으면 완독 후 한껏 뭉툭해진 연필심이 미덥다. 이 또한 책을 음미하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책방 옆자리의 여성 분은 연필 한 자루를 빌려 갔다. 흔치 않은 일이라 당황하던 찰나, 빌려 간 연필로 책 위에 밑줄을 긋는 모습을 보곤 쓰여나간 연필심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나와 같은 버릇을 지닌 애독가가 있구나, 마음이 닿은 골자 아래 줄을 긋지 않고는 못 배기는 강박이 저 사람에게도 있구나 생각했다.


그은 문장이 무엇인지 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내 몫의 책을 읽어나갔다. 그 후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나를 떠났던 연필이 돌아왔고 그 심의 모양새는 뭉툭했다. 떠 있던 봄 해가 서쪽으로 저물어가던 시간이었다. 뾰족했던 두 자루의 연필이 무디게 변한 모양새는 귀갓길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날 책에 남긴 흑심은 모조리 늦봄의 흔적이고, 그 흔적은 다른 계절의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그날 오후 책방에서의 시간이 퍽 좋아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