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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린 Lily Jun 13. 2024

늦봄의 흔적

그 흔적은 다른 계절의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나는 어쩌면 책을 아끼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을 모아놓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책에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 밑줄을 긋거나 메모와 낙서를 하는 건 기본이고, 읽던 곳을 표시할 때는 페이지 모서리를 접는 걸 넘어서서 아예 페이지의 반을 접어버린다.”

- 재영 책수선, <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 中


나와 많이 닮은 문장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무언가를 많이 쏟는다. 커피나 우유, 혹은 감상이 옹골진 눈물 같은 것. 남겨진 자욱들은 선연하게 남아 회상의 단초가 된다. 또, 나는 독서 중 나만의 표식을 빈번히 남긴다. 고요히 생각을 이어가게 한 문장의 뒤에는 ‘…’을 새겨보고, 신선한 충격을 준 문장 끝에는 진한 느낌표를 새긴다. 그것이 나에게 다시금 파동을 일으킬 것을 기대하며 말이다.



늦봄, 책보다 밖을 더 보는 계절이다.


책을 읽다가도 종잇장 위 여울처럼 흐르는 햇빛에 자꾸 창문을 보게 된다. 책 속 세상보다 다채로운 색이 꿈틀거리는 계절, 그렇기에 되레 그 풍경 속에서 책을 읽기 좋다.


4월 끝이 다가올 무렵, 봄을 만끽하며 책을 읽기 위해 책방에 갔다. 언제나처럼 2B 연필 몇 자루를 챙겼다. 도서를 펼치기 전, 연필을 날렵하게 깎아 놓으면 완독 후 한껏 뭉툭해진 연필심이 미덥다. 이 또한 책을 음미하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책방 옆자리의 여성 분은 연필 한 자루를 빌려 갔다. 흔치 않은 일이라 당황하던 찰나, 빌려 간 연필로 책 위에 밑줄을 죽죽 긋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쓰여나간 연필심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나와 같은 버릇을 지닌 애독가가 있구나, 마음이 닿은 골자 아래 줄을 긋지 않고는 못 배기는 강박이 저 사람에게도 있구나 생각했다.


그은 문장이 무엇인지 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내 몫의 책을 읽어나갔다. 그 후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나를 떠났던 연필이 돌아왔고 그 심의 모양새는 뭉툭했다. 떠 있던 봄 해가 서쪽으로 저물어가던 시간이었다. 뾰족했던 두 자루의 연필이 무디게 변한 모양새는 귀갓길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날 책에 남긴 흑심은 모조리 늦봄의 흔적이고, 그 흔적은 다른 계절의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그날 오후 책방에서의 시간이 퍽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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