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마음을 무르게 하는 계절
변덕스러운 여름의 능선을 걷던 중, 오늘의 날씨는 맑음. 누군가는 팽팽한 뙤약볕이 밉다며 양산의 둥근 그늘 아래로 이 맑음을 피할 법한 날씨다. 타고난 체질이 더위에 강한 나는 여름의 후더분함을 미워하지 않는 편이다. 여름 애호가로 살기 적합한 체질이다. 더위가 체질을 이기는 날에도 곱게 영글은 복숭아 한 입에 모든 마음이 괜찮아지곤 했다.
여름엔 싫은 게 없다. 이르게 기지개를 피우는 햇살과 생기를 더해가는 푸른 잎, 계절 핑계로 방문하는 물결의 고향도. 우기가 찾아오면 멍 때리고 앉아 젖은 초록을 바라보는 일도 좋다. 잠깐 걷고 싶을 때엔 아무 차림새로, 아무 우산이나 들고나가 흠뻑 얼룩지기도 해보고 말이다.
우기의 끝, 그 후에 찾아오는 것들은 더욱 찬연하다. 진득한 여름 냄새가, 잎맥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의 여운이 마음에 잔뜩 스며 나를 간지럽히는 순간. 여름은 늘, 마음에 열을 앓게 한다. 자꾸만 꿈틀 거리는 열기에 무엇이라도 사랑하고 싶다.
재작년 여름, 새로이 사랑하게 된 것은 흐린 날의 바닷가다. 공교롭게도, 재작년 나의 여름 여행은 모조리 흐린 날에 이루어졌다. 훌쩍 떠날 채비를 하는 날에는 거짓말 같은 잿빛 하늘이 나를 반겼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못마땅했는데 그만의 정취를 알고 나니 싫어할 수 없었다.
흐린 날에 선명해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낮게 가라앉은 구름이 수평선과 맞닿은 풍경, 한산한 바다의 고요함. 깊은 색의 하늘이 바다의 그림자 같기도 하다. 맑은 하늘에 시선을 뺏겨 보지 못했던 아래의 것들에 집중도 해본다. 이런 날에는 대지의 모든 색이 짙고 무거워진다. 흐린 날만의 녹두색, 고동빛의 나무는 묵직한 향을 내고 그것이 감각을 일깨워주니까. 나무 향을 닮은 음악을 들으며, 걷는 시간으로 여행을 채운다. 이 모든 것은 한데 모여 마음의 불순물을 쓸어간다. 마음은 하늘과 다르게 이런 것에 환히 맑아지곤 했다.
현재는 초여름, 뜨거운 이 계절이 돌아왔다. 모진 마음을 무르게 하는 힘을 지닌 사랑스러운 계절. 맑음과 흐림, 모두의 여름을 사랑하는 나는 여름 끝물부터 여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