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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디디아 Aug 31. 2020

나는 과부입니다.

나는 평균보다 짧고 넓적한 엄지손가락과 엄지손톱을 가지고 있다. 짜리 몽땅한 엄지손가락은 어린 시절 나의 complex였다. 고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은 '자기 자랑'이란 주제로 글쓰기 과제를 내주셨고, 나는 고민 끝에 엄지손가락을 주제로 작문을 했다. 처음으로 나의 못생긴 엄지손가락을 자세히 살펴보았고, 엄지손가락으로 인해 내가 들었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내 엄지손가락을 본 사람들은 처음엔 잠시 웃지만 ‘이런 손톱을 가진 사람은 복이 있다. 수학을 잘한다. 부지런하다. 손재주가 많다.’ 등 덕담을 해 주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주워 모았고, 평균보다 짧아 다소 웃긴  나의 엄지손가락이 해내는 놀라운 일들에 대해 글을 썼다. 나의 작문은 우수 작문으로 선정되었고, A플러스 받았다. 그 후 난 엄지손가락 콤플렉스에서 벗어났고, 엄지손가락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손가락이 되었다.       


사춘기 시절 엄지손가락만큼이나 내가 거슬려하는 단어가 있었다.   

 과부”       

 난 사람들이 엄마를 과부라고 부르는 게 싫었다. 과부의 사전적 의미는 남편이 죽고 배우자 없이 혼자 사는 여자를 말한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과부란 단어는 부끄러울 것 하나 없이 당당한 느낌마저 준다.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닌데 난 그냥 그 단어가 싫었다. 거슬리는 그 단어가 이젠  나를 설명하는 여러 수식어 중 하나가 되었다. 사별 후 나를 과부라고 부르는 타인은 아직 없었다. 나를 과부라고 말한 첫 번째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어느 날 “나는 과부니까! 과부에게 할 소린가?” 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스스로 과부란 말을 넣어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사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처음 이 말을 뱉은 후 마음이 칼에 배인 듯 아팠다. 왜 내가 껄끄러운 단어를 스스로에게 사용한 것인지 생각해 보니 그건 과부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나의 새로운 complex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움츠리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에 정면 승부를 해보고 싶어졌다. 부정할 수 없는 나의 현실을 피하고 외면하다가 타인에 의해 과부라 불리는 순간 나는 활에 맞은 듯 깊은 내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럴 바엔 과부란 호칭에  스스로 익숙해짐으로 그것이 더 이상 나에게 상처가 될 수 없게 만들고 싶다.

     

 나는 '잘 사는 과부'란 어떤 삶일까 자문한다. 과부가 되기를 원하진 않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찌질한 과부보다는 멋진 과부로 살아보고 싶다. 남편이 죽고, 배우자 없이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며 잘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수없이 자문하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잘 사는 과부가 되려면   

   

첫째,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남편이 든든했던 이유 중 하나는 혹 내가 아프면 그는 내 똥오줌도 받아 줄 사람이라는 확신이었다. 남편이 죽고 얼마 후 난 혼자 대상포진을 앓았다. ‘나 지금 너무 아파’라고 징징대며 하소연할 곳이 없음을... 밤새 열 감기를 앓아도 물수건 한 장 머리에 올려줄 사람이 없는 서러운 날도 있을 것임을 알았다.  내 한 몸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까 두렵고, 내가 병들거나 다쳐 가정이 흔들리고, 아이들의 삶이 무너질까 두려웠다. 몸과 마음의 건강함을 지키는 것이 나와 아이들의 행복을 지키는 기본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제 나는 매일 아침 운동을 다니고, 세끼 밥과 영양제를 챙겨 먹고, 마음이 즐거워지는 법을 고민하고 실행에 옮긴다.      


둘째, 나와 자녀들을  돌볼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능력을 유지해야 한다.


나는 결혼 후에서 계속 일을 해온 워킹 맘이다. 아이들이 어릴 땐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지만 과부가 되고 보니 힘들게 지켜온 직장이 고맙고 다행스럽다. 나와 아이들이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삶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나 역시 내 일을 통해 우리 가족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위로와 힘을 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한때는 적당히 일하고 빨리 은퇴한 뒤 놀아야지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젠 내 일이 전보다 더 소중해졌고, 직업을 통해 먹고사는데 필요한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사회적 가치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소명으로 만들고 싶다. 나는 업무능력 향상을 위해 다시 강의를 듣고 공부를 시작했으며, 시범사업에도 참여했다.      


셋째, 나는  지혜로워져야 한다. 


과부가 되어보니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100% 터놓고 상의할 사람이 없음에 두려움과 외로움, 결정의 무게감을 느낀다. 남편이 있을 때는 대부분 대소사를 남편과 상의해서 결정했기에 옳든 그르든 큰 두려움 없이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자녀들에 관련된 온갖 문제와 미래에 대한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도  남편 없이 나 혼자 문제를 해결하고 자녀에게 조언을 해야 하는 것이 조심스럽고 어렵다. 나는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어느 시기보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조심스러워진 나를 마주한다. 나는 더 많은 지혜와 연륜을 배우기 위해 인간관계를 확장해 가고 있지만 동시에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과한 욕심에 제 발등을 찍지 않을 절제함을 주시길 신께 기도한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크고 깊이 생각하며 인내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어느 순간보다 더 솔로몬에게 주셨던 지혜의 갑절을  내게 주시길 기도한다. 또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마시고, 신의 선하고 지혜로운 ‘체’로 나의 기도를 걸러 응답하심으로 신의 지혜가 내 삶을 지배하시길 기도한다.       


넷째, 나는 자신을 사랑하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남편의 죽음으로 결혼생활이 끝났을 뿐, 나 자신은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과부가 되는 순간 스스로  초라해졌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다. 난 그대로인데 남편의 부재가 왜 나를 초라하게 느끼게 하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다만 남편을 잃음으로 나는 주저함 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연인을 잃었고, 마치 지붕이 사라진 추운 집에 외투도 걸치지 못한 채 머무는 시린 느낌을 갖는다. 살아온 경험으로 볼 때 사람은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때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해진다. 미래의 나는 누군가를 만나 다시 사랑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나를 사랑해 줄 누군가의 존재 유무를 떠나, 내가 당당한 과부로 살려면 먼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깊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나조차도 나를 사랑할 수 없다면 어떻게 누군가 나를 사랑하길 기대할 수 있을까? 나조차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서 어떻게 타인이 나를 소중히 여겨주길 기대할까? 나는 자신을 사소하게 사랑함으로 나를 어여삐 여기고, 빛나는 자신감을 가진 당당한 과부로 살고 싶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멋진 과부가 되지 않았을까?      



 내 이름 앞엔 직업과 역할, 직분, 나의 상황을 표현하는 여러 수식어가 붙는다.

그중 과부는 나의 엄지손가락처럼 초라하고 못 생긴, 절대로 드러내 말하고 싶지 않은 수식어다. 하지만  짜리 몽땅한 나의 엄지손가락이 나로 하여금 많은 일을 야무지게 처리하도록  만든 것처럼 ‘과부’는 그 어떤 수식어보다 나의 내면을 단단하게 성장시킬 수도 있다. 성경엔 과부를 통해 역사하신 신의 계획과 기적들이 자주 언급된다. 이세벨 여왕에게서 도망친 엘리야를 숨긴 사르밧 과부, 나오미와 룻,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 예수님을 만나 죽은 아들을 살린 나인성 과부, 평생 선행과 구제를 일삼던 과부 도르가와 베드로, 아기 예수를 만나 첫눈에 알아보는 늙은 과부 안나. 왜 하나님은 많고 많은 사람들 중 과부를 통해 기적을 보이시며 자신의 마음을 담고 계획을 세우시는가? 나는 과부 되기 이전과 이후로 달라진 나의 내면을 비교해 본다. 과부가 된 후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무력한 자신을 보게 된다.  성경을 보면 신은 가장 작고 연약한 자, 스스로 무능하다고 고백하는 자들을 불러 신의 계획안에  세우신다. “제일 약하고 제일 작은 자”라고 고백하는 기드온을 용사로 세우셨고, 말이 어눌한 모세를 출애굽의 리더로 세우셨다. 과부에 대한 묵상을 하며 나는 감히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이제야 겨우 하나님의 마음을 눈곱만치라도  담을 수 있는,  하나님이 사용하고 싶어 지는 가장 작고 가장 연약하고 가장 초라한 그릇이 된 것은 아닐까?”      


나의 묵상이 맞는다면 내가  엄지손가락을 사랑하듯 “과부 ” 란 호칭을  complex로 여기지 않고, 가장 사랑하는 수식어로 여기게 될 거란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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