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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디디아 Sep 07. 2020

인생의 오답노트

( 사별 후 내가 알아가는 것)

  

학창 시절 선생님은 시험이 끝난 후에 꼭 오답노트를 쓰라고 하셨다. 결과에 후회하기보다는 왜 틀렸는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풀어냈다면 제대로 답할 수 있었는지를 오답노트에 정리하라고 하셨다. 아이들을 키우며 나는 선생님과 같은 말을 했었다.


“ 결과에 만족하든 불만족 하든 시험이 끝난 후엔 꼭 오답 노트를 써라 ”    

  

고백하건대 살아오면서 내가 치른 모든 시험에 오답정리를 하진 않았다. 어떤 때는 그 일에 성실했고, 어떤 때는 대충 넘어갔다. 22년의 결혼생활이 끝난 지 620일이 넘어갔고 나는 끝나버린 시험지를 다시 보듯 22년의 결혼생활을 뒤돌아보았다. 왜 한 남자를 남편으로 선택했고 평생을 약속했었는지, 그와 내가 약속한 대로 우리가 살았었는지, 우리의 바람대로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아내였고 남편이었는지.


돌아보니 22년의 결혼생활에서 나는 옳은 때도 있었고 틀린 적도 있었다. 내 결혼생활에 점수를 매기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틀렸던 부분이 사별 후 더 선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마치 시험이 끝난 후  어떤 문제가 왜 틀렸는지 깨달아지고 정답이 제대로 보이는 것처럼 그가 죽고 우리의 결혼이 끝난 후에야 내가 범한 오류와 오답이 보이고 그 이유가 알아진다. 오늘 나는 22년 결혼생활 오답노트 중 오답 하나를 고백해볼까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22년의 결혼 생활을 했다. 오래 길을 걷다 보면 오르막과 내리막을 만나듯 삶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서 어느 시절엔 행복했고 어느 시절엔 행복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었고, 어느 날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22년 결혼생활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았다. 어느 시절을 풍성하고 따뜻했고, 어느 시절은 시들고 마른 잎 같았다. 함께 있어도 혼자보다 외로울 수 있었다. 철없던 나는 마음이 힘든 어느 시절엔 나를 힘들게 하는 대부분 원인이 남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한때는 그가 밉고 그에게 서운했다. 하지만 사별 후 지난 22년 우리의 결혼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잘못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그 시절 신이 우리에게 주신 행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고 감사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나의 오답은 “ 당연함 ”에서 시작되었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김으로 내가 받은 사랑과 헌신에 감사할 줄 몰랐고, 내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나의 원대로 되지 않을 땐 쉽게 불평하고 화를 냈다. 결혼을 한 후 남편이 나와 가족을 위해 하는 것들 대부분이 내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여행을 떠나면 당연히 그가 운전을 했고, 복잡하고 껄끄러운 문제를 처리하는데 전면에 나서는 것도 당연히 그였다. 맞벌이 부부니 육아와 가사도 당연히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기대한 만큼 그가 가사와 육아를 분담해 주지 않을 때 나는 짜증을 내곤 했다.


사별 후 그가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그가 했던 모든 일이 어느 하나 당연한 것이 없었음을 깨닫는다. 못을 박고 집안의 고장 난 것을 고치는 사소한 일부터 기념일 꽃 선물까지... 내가 당연하다 여겼던 많은 것들이 그와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나는 이제야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그 모든 일들과 순간에 감사해야 했음을 깨닫는다.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특별하게 여겼다면 나는 더 자주 감사했을 것이고, 우리는 더 자주 행복을 누림으로 그와 나의 결혼생활은 더 따뜻했을 것이다. 나의 익숙한 당연함이 감사를 갉아먹는 좀 벌레였고, 행복점수를 깍아내린 오답이었다. 이해인 수녀님의 ‘감사 예찬’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감사만이 꽃길입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걸어가는 향기 나는 길입니다.

감사만이 보석입니다.

슬프고 기쁠 때도 감사할 수 있으면

삶은 어느 순간 보석으로 빛납니다. "  

( 이해인. 감사 예찬의 일부)     


나는 '당연하다' 여김으로 향기 나는 꽃길에 돌을 던졌고, 고맙다는 말에 인색했다. 신은 내 삶에 다이아몬드를 주셨지만 나는 빛나는 보석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함'에 길들여진 나는 사별 후에도 감사를 갉아먹는 좀 벌레를 키우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22년의 결혼생활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통해 무엇이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지 못하게 만들고, 무엇이 내 인생의 오답이었음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한 걸음 나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늘 나의 밥상과 그 밥상 앞에 마주한 가족이나 친구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내일 일할 수 있는 나의 일터가 당연한 것이 아니고, 안부를 묻는 한 줄 문자조차도 당연한 것이 아니기에 나는 오늘 하루 내가 누린 많은 것들에 감사해야 한다.  

   

인생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남편에게 내일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듯 내게도 내일은 당연한 하루가 아니다.

누구도 내게 당연한 존재가 아니듯 나도 누군가에게 당연한 존재가 아니다.

남편과 내가 함께 하는 미래가 당연한 것이 아니듯

오늘 그리고 내일

나와 동행해주는 모든 이들이 당연하지 않다.      


너무나 익숙하게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특별한 것임을 잊지 않는다면, 생이 끝나는 날 나는 좋은 점수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인생의 오답노트를 써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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