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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수다쟁이 Apr 29. 2020

사랑, 시간의 무게에 대하여

이는 자발적 자가격리를 위해 2주 간 집에서 부모님을 관찰하면 느꼈던 나의 감상.


코로나 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 창이던 3월 말, 집에 내려갔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다녀온 뒤 시골에서 2주간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우리 집은 외부인이 오지 않는 시골 마을 한적한 동네에 해를 등지고 있는 곳이다. 오래간만에 긴 방학을 얻은 기분이었다. 마음속 찝찝함은 모두 던져 버리고 편안한 2주를 보낼 생각이었다.


아아, 집안에서 뒹굴며 먹고 자기만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이런 삶 얼마나 즐거운가:) 이런 마음으로 2주가 채워질 무렵, 엉덩이가 영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마지막 주말에 엄마는 가까운 산에 가자고 제안했다. 아침을 먹고 엄마 아빠와 옆동네 가까이에 있는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옆동네 마을 어귀에서 이어지는, 그저 그 근방 주민들만 알만한 산.


그 산에는 진달래 꽃이 능선을 따라 만발했고,  마치 능숙하게 산을 오르며 달래를 캐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 보조를 맞추는 아빠의 아지트 같았다. 십리가 조금 안 되는 거리의 산책로였는데 달래를 캐며, 또 잠시 숨을 돌리면서 걷는 엄마 아빠 때문에 오래 걸렸다.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고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고를 반복하며 너무 천천히 올라오는 엄마 아빠에게 심술이 나기 시작했다.


'충청도 사람들이라 그런지 어쩔 수 없이 느린가 봐'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두 중년의 부부는 딸의 재촉에도 아랑곳 않고 그저 자신들의 페이스에 맞춰 걸을 뿐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정상에서 마을 앞에 자리 잡은 저수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나가던 겨울이 시샘해서 부는 듯 봄바람은 아직 차가웠으나 '이것은 겨울바람이 아니야, 봄바람이야'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완연한 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산 이름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정상에 있는 옥녀봉에서 오로지 우리 셋- 이따금 동네 사람 몇만이 느낄 수 있는 봄이라 색다른 기분이었다. 내려가는 길에서도 봄바람을 따라 봄 내음이 진하게 밀려왔다. 아마 요 근래 가장 평화로운 봄을 맞이 했으리라.


약수터에 들러 시원한 물 한 잔을 하고 내려가려는 순간, 마음이 참 몽글몽글해졌다. 약수를 물통에 넣은 엄마는 물통을 들고 내려가기 시작했고 아빠는 물통을 가방에 넣으라며 가방 문을 열었다. 그런 아빠를 보며 엄마는 흐뭇한 미소로 '자기 가방 무거울까 봐 그러지' 라며 답했다.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물통을 가방에 넣고 산을 내려갔다.


우리 부모님은 한 때 위기도 많았으며 그렇게 다정한 사이는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느낀 부모님은 그랬다. 자주 다투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애정이 많은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년 부부의 서로를 향한 그 작은 배려에 내가 모르는 30년의 세월이 담겨있구나


나는 이 부부의 깊이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동안 불행한 모습을 크게 부풀려왔다. 한 번씩 크게 싸울 때마다, 사랑이 아니라면 이제 헤어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살아온 세월이 사랑이 아니니 후련하게 헤어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 제대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애송이의 같잖은 충고 같은 거였다.


작은 물통 하나로 저런 대화가 오가는 중년의 부부를 보며 사랑이라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연애를 하면서 그런 배려를 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상대의 배려를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여러 번. 그래서 나의 사랑은 완성되지 못했다.


부부가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를 배려하는 그런 마음으로 시간을 쌓아가는 것 같다. 그 시간의 무게를 감히 내가 어떻게 알까. 아마 그들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상대를 위하는 말 한마디와 행동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땅을 파보면 그 땅의 나이를 알 수 있다. 단층이 여러 겹 쌓이면서 그 땅의 역사가 생겼다 사라지곤 했다. 중년의 부부는 그렇게 만들어진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는 인연이었다. 자신들의 역사를 쌓아가며 이윽고 사랑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나의 경솔함에 반성하고 싶다. 이따금 일어나는 다툼이 그들의 땅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밭갈이였을 뿐이다. 하지만 지진처럼 크게 느꼈던 나는, 나를 불행으로 내몬다고 생각하며 자꾸 그들을 곁을 떠나려고 했다. 일상을 공유하지 않고 마음을 내놓지 않고 자꾸 숨으려고만 했다. 적어도 최근의 몇 년간은 그래 왔다.


내가 아는 그들의 역사는 그저 작은 점일 뿐인데, 내가 뭘 얼마나 그리 잘 안다고,,


이제야 그들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시간의 무게가 헛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해 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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